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오전 중에 택배를 부쳐준다는 당근 판매자의 말에 일도 손에 안 잡힐 만큼 오매불망 초조한 오전을 보냈다. 하지만 1시가 다 되어가도록 연락이 없었고, 혹시나의 혹시나 입금받고 튀신 거지 선생님 택배는 부쳐주셨을까요 하니 급한 미팅이 잡혀 못 보냈다고, 밤에 차로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오히려 좋았다. 그날 밤, 판매자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밤 10시에 OTT 셋톱박스를 건네받고 아직 설레기는 이르다며 분주한 손길로 티비에 연결했다. 언어 선택화면이 나왔다. 살짝 어제 크롬캐스트의 기억이 오버랩되었던 순간. 리모콘으로 확인을 눌렀다. 미동도 없었다. 크롬캐스트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말 그대로 온몸의 힘이 다 빠졌다. 1. 열심히 조립한 거치대에 연결한 티비가 신호 없음 화면만을 내보냈을 때, 2. 홍대까지 가서 사 온 크롬캐스트가 지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이은 세 번째 좌절감이었다. 머리가 그저 아득해지면서 도대체 이건 뭐랑 연결이 된단 말인지 짜증이 솟구치려는데 그제야 분주한 손길이 차마 가닿지 못했던 셋톱박스 자체의 리모콘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항상 내가 성격이 너무 급하다고 하셨다. 거기에 덜렁대기까지 한다고. 괜한 반발심에 20년간 아니라며 반박해 왔는데 과연 아니었을까, 아니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설마설마하며 확인 버튼을 누르니 그제야 화면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설레발을 치며 감동할 뻔했다. 그래, 이건 되는 게 맞는 거지 하며 다음 다음 누르며 설정을 마쳤다. 마쳤는데, 당시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 셀 수 없는 물음표와 당혹감과 놀라움 그리고 좌절감을 접어두고 결론을 말하자면 이 OTT 셋톱박스는 자체 계약한듯한 무슨 어린이 채널, 종교 채널, 부동산 관련 채널 같이 나에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리모콘을 누를 에너지조차 소모하고 싶지 않은 채널들을 수십 개 지원하는 와중에 모두가(내가) 원하는 티빙, 웨이브, 유튜브 등은 지원하지 않았다. 꼬박 30시간은 기다려 건네받은 이 OTT 셋톱박스라는 요물은 수많은 인기 OTT 중 내가 가장 사용하지 않는 넷플릭스만을 지원할 뿐 그 밖 다른 옵션은 생전 관심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도 없을 부동산 투자 지식 구하기 등에 그치는 게 고작이었다. 밤 11시. 누군가에게는 별 헤는 밤이었을 그 밤, 나는 눈이 빠지도록 해당 OTT 셋톱박스를 검색하며 하다못해 유튜브만이라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했다. 그 결과 유튜브, 티빙, 웨이브의 apk 파일을 해당 셋톱박스 자체에 설치하면 된다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셋톱박스 화면 자체에 인터넷 기능이 보여 혹시나 여기서 직접 apk 파일을 찾아서 다운받을 수도 있나 하는 생각에 리모콘으로 모음 하나 자음 하나 열심히 타이핑을 해가며 자정까지 지지부진한 시간을 보낸 결과 그것은 불가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윈도우 98부터 사용해 온 세대로서-그래도 나름 엠지의 끈을 놓지 못하지만- 그렇다면 답은 usb다라는 라는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 그 생각은 곧바로 핸드폰으로 번져, 어찌 보면 이것도 거대한 usb가 아닌가 하며 핸드폰에 차곡차곡 유튜브, 티빙, 웨이브 apk 파일을 다운받고 셋톱박스에 연결했다. 당연한 결과일지 몰라도 셋톱박스는 핸드폰을 usb로 인식하지 못했다. 선을 한쪽은 핸드폰에, 한쪽은 셋톱박스에 연결했는데 아직도 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그저 무슨무슨 어쩌고의 연유로 셋톱박스에겐 너무 버거운 아이인 것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당연히 아이패드도 인식하지 못했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태 간직하고 있던 건지 모를 영어 강사로 일할 적에 아이들 기출문제 담느라 사용했던 10년도 더 된 usb 역시 인식하지 못했다. 이것은 usb가 수명을 다한 것으로 이해해 본다고 해도 여태까지 셋톱박스가 인식한 usb는 0개인 셈. 아무리 어쩌고 저쩌고 제 나름의 이유로 인식하지 못하는구나 이해하고자 했지만 이쯤 되자 그냥 이 셋톱박스에 문제가 있어 usb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게 그냥 안 되는 건지 아니면 고장이나 불량인지, 티비 자체의 문제인지 셋톱박스의 문제인지도 아리송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 새벽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 잘 보지도 않는 넷플릭스를 보자고 이 티비를 샀다고? 티비를 기다리며 나도 모르게 부풀려온 기대감, 티비를 받은 이후 줄줄이 이어진 좌절감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이럴 바에야 그냥 반품하고 스마트티비로 다시 사자 싶어 그 시간에 드라이버를 찾아 티비를 거치대에서 분리 후 벽에 세워둔 채 침대에 누웠는데 심란해서 잠도 안 왔다.
티비 반품 비용, 크롬캐스트와 셋톱박스 사느라 날린 돈들을 헤아리며 멍청비용 거하게 썼다고 생각하자, 그냥 마음 편하게 그러기로 하자 스스로에게 억지로 잽을 날려 기절시키다시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거냐고 반 협박하듯 다독이며 잠을 청하려는데 마지막 보루로 대용량 usb가 떠올랐다. 이전 노트북도 백업하고 각종 영화와 미드도 넣어두었으나 아이패드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OTT라는 게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거의 거의 잊혀진 나의 마지막 하나 남은 저장장치. 기억의 끝을 잡고 아직 채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들을 헤집어 겉면이 부식될 정도로 낡은 인조 가죽 파우치 속에 담긴 대용량 usb를 찾아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파스스 흩날리던 파우치 가루들. 내 멘탈이 이러한 결말을 맞게 되지 않기만을 제발 바라며, 다분히 지쳤으나 그럼에도 희망은 아직까지 놓지 않은 채 조심스레 벽에 세워둔 티비와 셋톱박스를, 셋톱박스와 대용량 usb를 연결했다. 차마 화면을 바로 보기 힘들어 실눈을 떴던 것 같기도 하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으로 셋톱박스는 usb 인식 기능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 대용량 usb 역시 셋톱박스에게는 너무 버거운지 인식을 했다 말았다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인식은 할 줄 아는 것이었다. 이제 다 되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 열심히 따릉이를 타고 홍대 다이소에 가서 usb를 사왔다. 얄궂은 표정의 노티드 도넛 스티커를 붙여둔 내 노트북은 이미 3년 전에 스스로 수명을 거두었기에 apk 파일들은 피씨방에서 usb로 옮겨야 했다. 혹시나 하며 회사 노트북으로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나 보안 어쩌고의 이유로 usb 연결이 불가했다. 사양 높은 게임에 관심 둔 적 없는 인생, 끽해야 크아만 가끔 하면서 내 닉네임 뜌하뜌하-반려견 이름 줄임말+하이를 2번 반복한 것-가 다분히 유치했는지 어느 초딩이 야 너 몇살이냐 하길래 한 두 번 무시하다가 의지의 삼 세 번 정신의 한국 초딩이 세 번째 묻길래 서른이다 왜 하자 꺼져 나는 백살이다 하길래 그렇겠거니 하고 백 살 어르신의 캐릭터를 죽여버린 적은 있어도 피씨방을 간 적은 살면서 손에 꼽기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피씨방 컴퓨터의 전원이 다 켜져 있어 키오스크에서 시간 단위로 결제 후 아무 데나 가서 바로 마우스만 건드리면 사용 가능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마우스를 움직여도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길래 ^.ㅠ 이런 표정으로 피씨방 알바에게 이거 어떻게.. 말을 흐리자 알바는 전원을 켜셔야죠 했다. 그래, 전원은 켜라고 있는 거겠지.피씨방 시간 최소 단위 10분을 결제하고 2분 만에 usb에 파일들을 옮겨 담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usb를 셋톱박스에 꽂았다. 꼭 되어야만 할 것이야. 안 된다고 어쩔 도리도 없지만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apk 파일을 클릭한 순간 또 어쩌고 저쩌고의 이유로 안됨이라는 에러 메세지가 떴다. 유튜브, 티빙, 웨이브 3개의 apk 파일이 전부 그랬다. 이제 웃음도 안 나왔다.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자 자기는 이 대목에서 울었을 거라고 했다. 나도 울었을까. 울지는 않았고 그저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튜브에 뻔히 나와 같은 셋톱박스를 구입한 사람이 apk 파일을 설치하는 영상이 있는데 내 거라고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만약 내가 다운받은 apk 파일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네이버에 내가 구입한 OTT 셋톱박스를 판매하는 스토어가 있었다. 후기들은 죄다 유튜브 잘 나온다는 호평 일색이었다. 염치를 무릅쓰고 판매자에게 친구에게 선물 받았는데 유튜브가 안 돼요 고장인가요 하니 친절하게도 문자로 유튜브 apk 파일 다운로드 링크를 보내주었다. 링크로 들어가 파일을 다운 받으며 이게 아마도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것마저 안되면 더 이상은 방법이 없겠다고.
파일을 usb에 옮기러 다시 피씨방에 가야 했는데, 이제 피씨방 컴퓨터는 전원을 켜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아는데 너무 가기가 싫었다. 지하인 피씨방에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도 매캐한 내부 공기도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도 싫었다. 그래서 얄궂은 스티커를 붙여둔, 심지어 집안도 아니고 베란다에 처박아 둔 내 노트북을 꺼내왔다. 티비 구입 후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으니 3년 전 수명을 나와 합의도 없이 거둔 이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눌러보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실로 3년 만에 노트북 전원을 연결했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노트북이 켜졌다. 역시 가전은 엘지인가. 노트북이 가전은 아닌 것 같지만서도.
3년 만에 정신을 차린 노트북은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며 혼자 분주했다. 너는 업그레이드까지는 할 필요도 없어, 그저 파일만 usb에 옮겨주면 될 뿐이야 생각했지만 노트북은 늙었어도 낡을 수는 없었나 보다. 장장 10여 분의 업그레이드를 마친 뒤에야 마침내 파일을 옮길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이 파일 역시 설치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내 노트북이 다시 작동하는 것을 알게 된 것으로 나름의 수확이라고 생각했다. Usb를 셋톱박스에 연결했고, 더 이상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은 채 apk 파일을 눌렀다. 유튜브가 설치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티비를 다시 거치대에 조립했다. 몹시도 아쉬움이 남았지만 티빙과 웨이브는 아이패드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스스로와 타협 아닌 타협을 하고 티비 반품 의사를 접었다. 지금 와서 궁금한 것이 넷플릭스 화면이 찍힌 수많은 티비 후기들은, 그 구매자들은 전부 나와 같은 수순을 거친 것인가?
크롬캐스트는 곧바로 당근에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택시비까지 더해 올리고 싶었으나 구매가보다 저렴하게 올렸음에도 쿨거래를 하겠다며 제멋대로 내가 올린 금액에서 맘대로 만원을 깎아 제시하는 헛소리들을 몇 번 차단하고 판매 의지를 상실한 어느 날 유튜브에서 10년 된 티비도 '이것'만 연결하면 스마트티비가 된다는 영상을 보았다. 그 '이것'은 크롬캐스트였다. 아니, 10년 된 티비도 된다는데 아마도 올해 만들어졌을 이 티비는 왜 이럴까 싶어 얼토당토않은 심정으로 무턱대고 티비에 다시 연결해 보았다. 갑자기 크롬캐스트가 연결되었다. 언어 선택도 됐고 모든 게 다 됐다. 도대체 뭘까? 그래서 나는 지금 두 달째 크롬캐스트로 유튜브와 티빙,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 이 글을 쓰며 OTT 셋톱박스를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도 처박아 뒀음직한 장소들을 여러군데 뒤져봤으나 여태까지 셋톱박스는 발견되지 않고있다. 티비도 인생도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