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사무실에 출근한 날이었다. 재택근무를 주로 하기에 사무실에 출근하는 날이면 평소의 2배는 됨직한 피로를 느꼈고 그날도 그랬다. 그저 얼른 저녁 준비를 끝내고 저녁을 먹고 강아지 산책까지 마친 뒤 쇼파에 쓰러질 생각뿐이었다. 피곤하니 청소는 로식이에게 맡겼다.
그날 메뉴가 뭐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종국에 그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먹는 걸 매우 좋아하는 나인데도. 무언가를 끓였거나 졸이고 있었던 기억은 난다. 어느덧 조리의 끝자락. 나는 평소 버겁거나 힘들게 느껴지는 일을 할 때마다 숫자를 세는 버릇이 있다. 주로 운동을 할 때는 카운트 다운을 한다. 스쿼트를 100개 한다고 치면 90개부터는 10, 9, 8 이런 식으로 카운트 다운을 하고 복싱을 한다고 치면 라운드의 3분 중 너무 힘들 때 마지막 30초, 20초, 10초를 세며 이만큼만 더 치면 된다거나 혹은 시간이 이만큼밖에 남지 않았으니 더 세게 쳐보자며 내 자신과 타협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할 만 한데 버겁긴 한 일들, 예를 들면 계단 오르기라던지 일정이 아주 빠듯한 날 같은 것을 앞두고 있다면 과정이 진행될수록 이제 1/3 한 거야, 이제 절반 왔어, 이제 75%야 거의 다 왔다라며 스스로 다독인다. 그때는 은연중에 90%를 머리에 떠올렸던 것 같다. 곧 불을 끈 다음 아마도 밥이나 면 위에 붓기만 하면 됐을 것이다. 아, 그날 아마도 햇반을 돌렸나 보다. 조리 중이던 불을 끄고난 뒤 시선이 주방 카운터 우측에 위치한 전자레인지로 향했다. 참고로 전자레인지 약 1미터 앞에는 강아지 배변패드를 두었고 우리 집 바닥은 온 집안 전체가 비교적 밝은 갈색의 우드 타일 같은 것으로 시공되어 있다. 전자레인지와 배변패드 앞 그 자그마한 공간의 바닥도 예외는 아니다. 햇반을 꺼내려 전자레인지 손잡이 쪽으로 향했던 내 시선은, 인간의 눈이 으레 그렇듯 손잡이 밖 일부의 공간들도 흐릿하게 파노라마처럼 담아냈고 그 안에서 바닥색보다는 조금 더 짙은 갈색의 선을 포착했다. 어쨌거나 같은 갈색이어서인지 한 번에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나는 전자레인지 손잡이를 잡으려 허리를 굽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뒤 시선을 곧장 바닥으로 떨구었고, 그 짙은 갈색 선이 마치 자를 대고 그은 듯 약 1미터에 못 미치는 길이로 로식의 꽁무니로부터 그려지고 있음에, 그 시작이불행히도 배변패드임에 나는 순간 힘이 풀린 두 손에 칼이나 가위나 유리그릇 같은 것이 들려있지 않음을 그나마 조금은 안도했는지 모른다.
반려동물을 키우다 보면 수많은 사건 사고를 맞닥뜨린다. 내 기준에야 사건 사고이지 강아지 입장에선 한바탕 잘 놀았을 뿐인 일들. 사전적 의미의 강아지를 처음 집에 데려온다면 사건 사고의 스케일이나 빈도는 그저 경이로울 지경인데, 처음에는 말도 못 알아듣는 강아지를 교육이랍시고 마구 혼내도 본다. 하지만 이빨이 자라나는 잇몸은 가렵고 인간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는 강아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또 다른 핸드폰 충전기나 가구 다리, 가전제품 전기 선, 애플 펜슬, 하다 못해 신용카드 IC칩까지 물어뜯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볼 뿐이다. 마감 기한이 내일인데 애플펜슬 촉이 갈갈이 찢겨 작업 마무리를 하지 못한 밤, 이미 가게도 닫은 밤, 부랴부랴 버스까지 타고 낯선 동네에서 당근 거래로 애플펜슬을 사서 돌아오며 이놈의 자식 진짜 속에서는 천불이 나지만 결국에는 안다, 그걸 강아지의 시야가 닿을 수 있을 법한 곳에 둔 나를 탓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에게야 중요하고 값나가는 것이지 강아지에게는 한낱 장난감일 뿐인 것.
로식도 그랬을 것이다. 청소를 시키길래 했을 뿐이고 배변패드 위에 올라갔는데 그곳에 강아지 배설물이 있었을 뿐이고그 것을 청소해야 할 거대한 먼지 덩어리로 인식했을 뿐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먼지 덩어리가 깔끔히 쏙 빨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고.. 질척임을 남기며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의 바퀴에, 몸체 하부에, 청소솔들 구석구석에 번져갔던 것이다.
상황이 파악된 나는 아아악 비명을 질렀고멍해진 머리로나마 저거, 로식이부터 끄자는 결론을 내린 뒤 삐그덕 대면서도 필사적인 움직임으로 로식의 전원을 껐다. 그다음 조리 중이던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그리곤 사건의 현장으로 되돌아가 이게 무슨 일인지 살피는데 그제서야 빵 위의 버터 마냥 바닥에 얇게 펴 발리고 로식의 몸체 하부 및 곳곳에 칠갑이 된 강아지 배설물에서 밀도 높은 악취가 풍겨왔다.
집안이 더러워지면 청소를 한다는 메커니즘은 그 더러워짐이 내 안에 설정된 기준값의 근사치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작동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준값이란 건 댈 수도 없었다. 만약 '청소가 필요한 더러움을 느끼는 기준'이라는 게 온도계 형식으로 존재했다면 로식의 몸체 하부를 본 순간 수치 Max에 다다르다 못해 폭발했으리라. 실제로 내 뇌도 마치 과부하가 걸린 듯 구체적인 생각은 할 수 조차 없었다. 그저 빨리 이 더러운 것들을 내 눈앞에서, 몹시 불행히도 내 손으로 치워버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바닥부터 마구마구 닦기 시작했다. 거의 다 닦다 보니 생각이 다른 곳에 번지기 시작했다. 바닥 닦기 쯤이야 살면서 수백 번도 더 했다 치지만 로식 청소는? 산지 일주일은 됐을까, 이런 초 단기간 안에 이런 불상사로 청소 혹은 AS를 맡긴 사람도 있으려나? AS 비용은 또 어떻게 될까? 이사하느라 통장 잔고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데 부모님에게 손 벌려야 하나?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하나? 내가 저녁 식사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진작에 잊었다.
로식은 내가 처음 접해보는 신문물, 무려 로봇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청소기지만 어쨌거나 청소기는 청소기 아닌가. 내가 사용해 본 청소기들은 전부 먼지통을 분리해 비울 수 있었으며 흡입구의 솔 역시 분리가 가능했다. 이미 사건이 벌어진 것 만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여기에 AS 비용이라는 부가적인 스트레스를 더할 수 없었고, 옷장 구석에 넣어 두었던 로식이 사용설명서를 꺼내와 청소 섹션을 펼친 뒤 찬찬히 로식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로식의 모든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냄새가 복병이었지 분리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로식의 앞 더듬이 같은 청소솔 2개, 기다란 메인 청소솔 1개, 먼지통을 분리했다. 내내 생각했다. 로식이 진짜 이 새끼 나쁜 새끼,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나는 저녁을 먹고 싶었을 뿐인데. 그리고 청소를 이어갔다. 배설물이 어찌나 청소솔 구석구석에 자잘히도 박혔던지. 분리할 수 없었던 총 4개의 바퀴와 로식의 몸체 하부는 소싯적 자전거 바퀴 닦던 기억으로 헛구역질을 하며 박박 닦아냈다. 사실 닦고 말리기만 하면 바로 작동을 시킬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내 희망과는 달리 청소솔들 구석구석에 끔찍이도 달라붙어 있던 그것은 제거 후에도 냄새로 강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사용하지 않는 철제 설거지통에 발을 씻자와 베이킹 소다를 듬뿍 넣은 뒤 물과 섞어 냄새가 남은 모든 것들을 집어넣었다. 발을 씻자는 발 냄새, 즉 인체에서 나는 냄새를 잡아주니 인체는 아니지만 견체에서 나온 냄새 역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 베이킹 소다는 과일을 씻거나 세면대 청소할 때 종종 사용하니 청소에 무언가 일가견이 있는 물질이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넣었다.
모든 것을 끝낸 뒤 하얗게 질린 나는 쇼파에 잠시 앉아있다가 그래, 로식이를 돌려놓고 배변패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분명히 로식이를 작동시킬 때는 배변패드에 아무것도 없었기에 억울한 감은 있지만 강아지는 언제든 배변패드를 사용할 자유가 있는 생명체인데 요리하느라 그것을 간과한역시 내 잘못이다 하며 이제와 당연히 기억날리가 없는 그날의 저녁을 먹었다.
이외에도 로식은 내가 분명 구역을 지정해 청소를 시켰는데 구역을 살짝 넘어와 사방에 풀어두었던 뜨개실들을 한 번에 흡입해 날 뒷목잡게 한 적도 있다. 다시 보니 내가 구역을 살짝 넘게 지정하긴 했지만 약 40여분 간 엉킨 실을 풀어야 했기에 로식이 이새끼는 진짜 개새끼다라며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바닥이 뽀득뽀득하도록 곧잘 청소를 해내는데도 매번 로식이 이새끼라고 불리는 로식도 억울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