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 멜버른에 2달가량 머문 적이 있다. 비록 멜버른이라는 도시와 그 도시에서의 내 일상의 모습과 이방인으로서의 나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국에 돌아왔으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멜버른에서의 생활 동안 내게 큰 인상을 남긴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 못지않게 충격적이던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들. 비가 한 세 방울만 쏟아져도 어디서 갑자기 어떻게든 우산을 펼쳐드는 한국인들과 다르게 호주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았다. 비가 추적추적을 넘어 꽤나 진하게 내리던 어느 어두침침했던 날, 위아래 검은 옷을 입고 검은 후디의 모자를 눌러쓴 채 두 손은 주머니에 꽂아 넣고 바닥을 바라보며 걷던 남자를 보고는 잭 더리퍼가 거리를 걷는다면 저렇게 걸었을까 했다. 정말 왜들 저래, 저러니까 머리숱들이 20대 중반만 돼도 저들을 떠나는 것이다 생각했으나 어느 날 시티에서 집으로 귀가하려는데 가볍게 비가 내렸던 것 같고, 우산이 없어 괜히 쇼핑몰을 하릴없이 돌아다녔던 것 같고, 또 괜히 치즈와 캐드버리 카라멜 초콜렛을 샀던 것 같고-멜버른에서 나는 캐드버리 카라멜 초콜렛에 미쳤었다-,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아 비를 맞고 돌아다니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싶다가 아, 여기는 우산 쓰는 사람이 오히려 없지 싶어 비를 맞으며 트램을 타러 가는데 이게 은근히 산뜻하고 간편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저 비 오는 날 두 손을 우산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에 그치는 간편함이 아니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학교에, 직장에, 약속에 나갈 때 집에서부터 우산을 챙겨 들고 다니거나 가방에 넣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에서의 해방, 우산을 또 잃어버렸냐며 엄마에게 잔소리를 골백번은 더 들었던 것 같은데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우산에 국한한 나의 건망증과 그리하여 비 오는 날은 어딜 가든 우산을 꼭 챙겨 집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서의 해방, 어차피 잃어버릴 것이라는 미래 완료형의 전제를 뒤로하고도 예쁜 우산을 비싸게 주고 샀는데 역시나, 또, 기필코 잃어버리고 말아 이럴 거면 왜 하는 자책감에서의 해방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굳이 쓸 필요는 없다라는 가뿐한 깨달음과 함께 한국에 돌아온 나는 수많은 약속들에 웬만해서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고 친구와 가족들에게 이곳은 멜버른이 아니며 너는 호주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그런데 그래서 그게 뭐. 나는 2n 년 만에 얻은 이 깨달음을 접어둘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오늘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음에도 집을 나서는 시점에는 비가 오지 않았기에 돗자리를 챙겨 망원 한강 공원에 왔다. 한강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슬금슬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브라질인가 어디에서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던 축구단 아이들이 번개에 맞아 즉사했다던데..라는 생각이 얼핏설핏 들었음에도 비를 피하기 위해 나무 밑에 돗자리를 폈고, 나뭇잎 사이사이를 통과해 떨어지는 몇몇 빗방울들을 맞으며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그러다가 도저히 맞아줄 지경이 아닌 수준이 되었을 때, 그때에도 마지못해 돗자리를 접고 하트 모양의 아치 아래 자리한 흔들 그네로 비를 피해 들어와 역시 그네는 흔들려야 제 맛이라며 아메리카노 한 입 발구르기 한 번이 벌써 83번째는 된 것 같은데 아직도 비가 그치지 않는다. 그치긴커녕 더욱 거세진다. 불과 지난주에 목욕을 당한 강아지가 아마도 나를 원망하겠지. 따릉이 반납 시간도 40분째 지나고 있다. 이쯤 되니 비 오는 날 아무래도 우산을 챙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흔들 그네에 40분째 발이 묶여버린 지금에야 든다. 그런데 그래도 그게 뭐. 까짓 거 집에 가서 샤워하고 머리 감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