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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Oct 08. 2024

숫자와의 씨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사에 대한 모든 것은 숫자로 귀결되었다.


날짜, 치수, 돈


이사 갈 날짜가 정해진 날부터 나는 디데이를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마치 십 대 때 남자친구와 투투 혹은 백일을 기념하기 위해 디데이를 세던 게 떠올라 유치하게 참 뭐 하는 건지 싶다가도 날짜가 다가올수록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디데이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그에 맞추어 이사 준비도 슬슬 진행했는데, mbti를 크게 믿지는 않지만서도 내 스스로가 다분히 계획적인 인간은 아님을, 주말여행을 간다면 금요일 퇴근 후 술 한잔 하며 즉흥적으로 결정해 떠나는 것이 낭만과 재미라고 생각하는 인간임을 고려했을 때, 이번 이사 준비에 내 몸속 '계획'과 관련된 모든 에너지란 에너지는 전부 끌어 썼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 시작은 아마도 돈이었다. 이사에 관한 예정된 지출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계획은 세우고 싶던 나는 부동산 복비, 포장이사, 입주청소, 가구로 항목을 나누어 예산을 잡았다. 사실 포장이사 경험이 한 번뿐이며 입주 청소는 해본 적도 없던 내가 무슨 기준으로 예산을 잡으려던 건지 알 수가 없다.  시세에 기반해서가 아닌 이 정도로 됐으면 좋겠다 하는 내 바램에 기반해 잡았다면 잡았나 보다.



이사는 내가 하는데 자기가 더 피곤한 강아지


몇몇 이사 업체들에 연락해 대략적인 견적을 받고 난 뒤 나는 깨닫는다. 바라건대 이 정도만 썼으면 좋겠다로 책정된 예산의 숫자 앞자리가 두 번은 바뀔 수도 있겠다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필 내가 이사하는 날이 손 없는 날이고 이 날은 더 비싸다고 했다. 손 없는 날의 의미를 최근까지 몰랐던 나는 다들 이 날 이사를 많이 해서 직원이 부족한가 보다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전 믿지도 않는 미신이 돈 몇십을 더 지출하게 만든 셈이다. 사다리차도 필요했기에 금액은 더 추가되었다. 나는 부르는 값을 그대로 주고 사면 바보라는 방콕의 짜뚜짝 시장에서도 더운데 피차 불편하게 입씨름하며 시간을 끄느니 그냥 바보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돈 몇십이 훅훅 추가되는 이사 앞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입장이 되고 말아, 견적 내기를 끝마친 이삿짐 직원에게 혹시 조금의 할인 같은 것이라던지..라고 운을 떼었고 직원은 이 사람이 지금 흥정이라는 것을 해보려 시도 중인 것인지 긴가민가 한 듯 아리송하고 애잔한 표정으로 현금가 150만 원으로 해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흔쾌히 금액을 조정해 준다면 이미 정해진 현금가가 처음부터 150만 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다음은 입주청소의 차례. 20대부터 총 네다섯 번의 이사를 해오며 까짓 거 하루 고생해서 때우자는 생각으로 매번 직접  청소를 강행했지만 이번에 이사 갈 집은 이전 세입자가 도대체 얼마나 더럽게 하고 살았던 건지 집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 아, 입주 청소는 무조건이다였을 만큼 직접 청소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입주 청소를 알아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mz들은 검색할 게 있으면 유튜브에 먼저 찾아본다는데 나도 mz라면 mz지만 유튜브에 쳐봐야 입주 청소 꿀팁 따위나 나올 것 같아 네이버에 검색을 했다. 이내 견적 비교 사이트를 클릭, 집의 평수와 조건들을 입력 후 견적을 내보니 무려 28곳의 업체에서 견적을 보내왔다. 선택 가능한 옵션이 너무 많아질 때면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이름이 마음에 든다 정도의 기준으로 좋아 보이는 몇 개만 대충 추려 그중에 거의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수준으로 대애충 고르곤 하지만 이번에는 나름 기지를 발휘하여 고객 질문에 복사 붙여 넣기 식의 답변을 하지 않으면서, 좋지 않은 리뷰에도 변명보다는 성의껏 사과와 추후 AS를 약속하는 업체를 골라 예약했다.

 


이사하는 김에 산 군고구마 메이커


그리고 마지막, 재면 잴수록 나를 더 혼란에 빠트렸던 가구 치수. 자취 가구들의 연식이 길게는 10년이 넘는 것도 있었다 보니 이사를 계기로 웬만하면 전부 버리고 새로 사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사 갈 집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기 때문에 가구 배송 때마다 사다리차 비용이 추가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이사하기 전에 가급적 모든 가구를  새로 사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선 버리기부터 시작했다. 사실 버리기는 이사를 처음 결심한 2월부터 소소히 진행해오고 있었는데, 잡동사니들을 버리는 것과 가구를 버리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수거 업체는 당최 왜 예정 수거일로부터 최소 3일은 지나야 수거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가구를 버리는 것, 이사 갈 집에 페인트칠하러 갈 때마다 집구석구석의 치수를 재보고 장바구니에 담아둔 가구들의 치수와 비교하는 것, 창문의 치수를 재고 커튼을 주문제작 하는 것, 가구 배치가 도저히 각이 나오지 않아 새롭게 갈아엎고 이미 재둔 치수로 골머리 앓으며 아예 가구를 새로 알아보는 것, 가구를 마침내 주문하고 배송 기사님과 배송일을 조율하는 것.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을 메모장에 기록하며 순차적으로 진행하면서도  내가 이 일들을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평소 계획이라고는 연말 직원 평가 작성 혹은 꼭 필요한 레포트 제출 빼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살고 있어서인가. 내 인생에 줄자를 가장 많이 꺼내 들었던 날들. 역시 인간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뭐든 하게 되나 보다.


코딱지만 한 방에 퀸사이즈 침대를 미리 주문해 침대에 방이 잠식당한 듯한 낮과 밤을 열댓 번 보내고 나니 드디어 이사 하루 전 날이 되었다. 반차를 쓰고 망원으로 날아가 입주 청소 상태를 점검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입주 청소에 대해 덧붙일 말은 참 많다만, 앞서 쓴 '좋자 않은 리뷰에도 변명보다 사과와 추후 AS를 약속한 업체'로 계약하길 천만다행이었던 것으로 일축하겠다-. 포장 이사 업체로부터 내일 8시부터 작업 진행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직 포장 이사라는 큰일이 남았고, 티비 구입, 에어컨 설치 및 청소가 남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성북에서 마무리 지을 일들은 모두 끝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혼자 소맥을 말았다. 그렇게 11시, 12시, 1시... 잠이 오지 않았다. 포장 이사 8시, 그 당시는 2시. 생각들을 그만 놓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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