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자체의 건물로서의 컨디션은 괜찮았지만 집 내부의 컨디션은 부동산 사장님들마저 남의 집을 어떻게 이렇게 해두고 살았냐며 혀를 끌끌 찰 정도였다. 그래도 곰팡이나 결로, 누수 증상은 없어 집이 먼지, 머리카락, 찌든 때로 더러운 거야 입주청소로 커버가 가능할 테니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벽 색깔. 집안 대부분의 벽지가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었으나 침실로 보이는 큰 방의 4면, 작은방 1면, 거실 2면이 각각 초록, 회색, 핫핑크로 도배되어 있었다. 다행히 집주인이 페인트칠을 허락해 주어 계약을 진행했으나 막상 페인트칠을 하려니 앞이 깜깜했다. 부동산에서는 그냥 도배를 새로 하지 그러냐 해서 살짝 흔들렸는데, 견적이 거의 100 가까이 나오는 바람에 전세로 살다 나갈 집에 내 돈을 그렇게까지 들이고 싶지는 않아 페인트와 페인트칠 도구 일체 도합 10만 원가량이 나오는 셀프 페인트칠로 마음을 굳혔다.
이사까지 약 한 달 반이 남은 상황, 우선 페인트부터 8리터를 주문했다. 별생각 없이 당시 살던 성북구 집으로 배송을 시키는 바람에 판매자에게 제발 주소 좀 바꿔주세요 제발요 애걸했다. 8리터 페인트를 들쳐 매고 망원동까지 이동할 자신은 웬만해서는 없었다. 이사할 집 주소로 문제없이 배송이 완료된 것을 확인 후 토요일이 되자마자 페인트칠을 하러 갔다. 중학생 때 내 방을 핑크색으로 페인트칠한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가까스로 그러모아 준비물을 챙겼다.
롤러 - 페인트칠할 면적을 빠르게 커버 치기 좋다. 붓으로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는 사회화된 인간으로서의 침착함과 이성을 잃기 십상이다.
적당히 얄쌍한 붓 - 콘센트 주위나 문 틈 같이 좁은 부위를 세세하게 칠하기에 좋다.
롤러 사이즈에 맞는 직사각형 바구니 - 칠할 만큼만 페인트를 부어 들고 다니기 간편하다.
비닐 테이프 - 테이프가 바닥, 창문틀 등에 튀지 않도록 커버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신문지 - 비닐 테이프로 채 커버되지 않을 수 있으니 혹시 몰라 바닥에 깔아 둬야 마음이 편하다.
물티슈 - 그럼에도 어딘가에 튀는 불상사가 발생했을 경우 재빨리 닦아내야 한다.
추가적으로 챙긴 것들은 고된 작업에 노동요가 빠질 수 없으니 블루투스 스피커, 벽의 윗부분을 칠할 때 밟고 올라갈 스툴, 그날 입고 버릴 티셔츠 정도가 되겠다.
가보자구
나는, 무려 칠해야 할 벽이 7면이나 되었지만, 아직 이사까지 5번의 주말이 남았고, 오늘 절반 다음 주 토요일 절반만 해도 시간적 여유가 충. 분. 한 데다 벽 하나하나가 그렇게 대단히 크지도 않고 나름 중학생 때 페인트칠을 해 본 경력자이기 때문에 이까짓 거 길어야 2-3시간이면 끝낸 뒤 망원의 유명한 빵집들 중 하나에서 빵까지 포장해 올 수 있겠다며 의기양양하게 집을 나섰다. 옆구리에는 스툴을 끼고.
가는 길에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포장해 이사 갈 나의 집, 아직은 바닥이 더럽다는 표현으로조차 모자랄 만큼 엉망진창인 나의 집에서 노동요를 빵빵하게 틀고 샌드위치를 먹으며 에너지를 비축한 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테이핑을 하고 침실부터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어라, 근데 이게 맞나? 원래 이랬던가? 침실 벽은 초록과 짙은 회색이 혼재된 상태로 당연히 페인트칠 한 번으로 원하는 색상이 나오지 않을 것임은 예상했지만-페인트 색은 따듯한 아이보리색으로 골랐다- 칠할수록 기존의 벽 색깔에 희끄무리한 얼룩만을 더럽게 남기는 듯한 이 느낌. 이거 과연 맞는 건가? 굉장한 의문과 의심이 들었지만 이미 칠한 거(더럽힌 거) 이제와 돌이킬 수도 없다며 한쪽 면을 칠한 뒤(더럽힌 뒤) 다른 면으로 옮겨갔다. 역시나 펼쳐지는 동일한 광경에 다시 한번 의문과 의심이 몰려오며 까딱하다가는 색이 중구난방일 뿐 아니라 더럽기까지 한 방에서 매일 잠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좌절과 함께 소름이 끼쳤다.
할 수 있어 에서 할 수는 있어 다만 결과는 보장되지 못할 것이야 로 자꾸만 생각이 기울었다. 두 번째 벽을 칠하자 첫 번째 벽 페인트가 얼추 말랐다. 세 번째 벽을 칠하려다 다시 첫 번째 벽을 덧칠했다. 천만다행으로 점점 아이보리 색상이 우중충한 회색을 덮어갔다. 그래, 역시 할 수 있어 로 생각이 바뀌어갈 즈음 다시 한번 어라, 이거 맞아?가 스쳐갔다. 나는, 혹자는 지겹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같은 음악, 같은 플레이 리스트들을 듣다가 듣다가 마침내 질릴 때까지 듣는다. 그래서 이 노래가 나오면 대충 몇 분이 흘렀구나 하는 지경인데 첫 번째 벽 2번, 두 번째 벽 1번 총 3번의 페인트칠을 마치고 노래를 흥얼대다 벌써 약 1시간 반이 흘러있음을 깨달았다. 2번 칠한 첫 번째 벽의 상태를 보아하니 벽 1면 당 3번은 칠해야 비로소 완성이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침실만 총 12번의 페인트칠이 요구될 터인데 3번 칠하고 1시간 반이 흘렀다. 이거 할 수 있는 것 맞을까?
몇몇 친구들은 혼자 하기 힘들어 보인다고 또는 재밌어 보인다고 와서 도와준다고 했다. 무척 고마운 제안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전 동네와 이전 집에서의 지난한 기억들을 딛고 새롭게 출발하는 망원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내 손, 내 힘으로 일궈내고 싶었다. 스스로가 너무 완고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꼭 그러고 싶었다.
쉬는 시간 없이 페인트칠만 내내 한다고 가정해도 순수히 6시간으로 계산되는 압도적인 노동 시간에도 혼자 이루어내고 싶다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도 참 나다 하면서 꾸역꾸역, 중간중간 아메리카노의 도움을 받아가며 페인트를 칠했다. 하다 보니 스킬도 늘었고, 벽 한 면은 창이 크게 자리한 덕분에 칠할 면이 꽤나 적어 약 5시간 만에 침실 페인트칠을 끝마쳤다. 중간에 5분, 10분씩 쉬었던 것을 빼면 한 4시간 정도 페인트칠을 했나 보다.
애초에 계획한 망원 유명 빵집들 중 하나에서 빵 포장하기는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지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기사님 바로 뒷자리에 앉아 터널을 지나다 문득 이것도 유산소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각 구글에 'Does painting burn calories'를 검색하니 분당 3.5에서 7 칼로리를 소모한다고 한다. 3.5는 너무했고, 4로 잡고 계산해 보니 시간당 240, 총 4시간 960칼로리를 소모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네이버에 유산소 운동의 정의를 검색해 보니 '운동 중 산소 공급을 통해 지방과 탄수화물을 에너지화해서 소모하게 하는 낮은 강도의 전신운동'이라고 한다. 페인트칠하는 동안 숨 쉬었고(산소 공급), 롤러 굴리느라 끊임없이 팔 움직임, 롤러에 페인트 바를 때마다 허리 굽혔다 펴거나 앉았다 일어남으로 기립근과 하체 자극, 높은 곳 칠할 때 까치발 들어 종아리 근육 사용(운동) 했으므로 페인트칠은 유산소 운동이 맞는 것으로 하겠다. 아니라도 좋게 좋게 그런 걸로 쳐 줍시다.
2주면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던 페인트칠은, 그다음 토요일에 비가 왔고, 비가 무슨 대수냐 페인트 생산 기술력이 어떻게 저떻게 좋아졌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라는 나의 믿음에 반해 도통 페인트가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데다 심지어 벽지가 자기도 속상했는지 울먹울먹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철수하고 3주 차에 홀가분히 끝을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