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 그래도 계약 기간인 6월까지는 살다가 나갈지 아니면 중간에라도 세입자를 구해 나갈지 고민하다 2월 초, 집주인에게 이사를 나가겠다고 알렸다.
남들은 2월-3월이 새 학기 시작을 앞두고 이사 성수기라던데 뜨문뜨문 집을 보러 오는 부동산 중개인마다 그런다. 아무래도 이때는 이사들을 많이 안 다닌다고. 그래서인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오는 정도로 집을 보러 왔다. 그중 정말 성가셨던 부동산이 있는데, 이 중개인은 집을 보러 올 때마다 나에게 매번 전화를 했다. 내가 아무리 재택 근무를 한다지만 엄연히 근무 중인데 그렇게 전화를 해댔다. 재택 근무 하는 사람이 혹시 백수로 보이기도 하는 건가 궁금증이 일었다.
이사 의사를 밝히고 두 달 뒤인 4월, 드디어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났다. 그 중개인과 함께. 그때는 사무실에 출근한 상태였는데 중개인은 연달아 3번을 전화해 5월 중순의 어느 토요일로 계약하겠다고 했다. 알겠다 하고 근무를 이어가던 와중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다. 갑자기 금요일로 계약을 완료했다고. 아니, 토요일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니 연로한 집주인이 모바일 뱅킹을 사용하지 않는 관계로 은행이 영업을 하는 금요일이어야만 했단다. 그래, 그랬지.
본격적인 집 구하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꼭 망원 이어야 했다. 한강과 근접하고,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 소품샵이 즐비하고 내 사랑 광화문, 서촌, 안국과도 그리 멀지 않은 동네. 7년 전 강아지와 함께 놀러 갔을 때 이 동네는 강아지랑 살기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동네.
미리 직방으로 연락해 둔 부동산에 갔다. 매물 3-4개 정도를 보여준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날 강아지 건강검진이 지연되는 바람에 약 30분을 늦었다. 그 결과 보여주기로 한 매물들 세입자들이 전부 집을 비우게 되어 당장 보여줄 매물이 하나도 없어졌단다. 앗 이런, 내 불찰이지만서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매물 나오면 연락 달라며 부동산을 나오는데 앞이 깜깜, 이렇게 또 다음 주 토요일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어 바로 옆 아무 부동산에나 들어갔다. 엄마뻘 여자 사장님이 계셨고, 원하는 조건들을 말씀드렸다.
반려동물 가능
방 갯수
1, 2층 비선호 - 더 이상 방범창을 참을 수 없었다. 이전 집에서 4년을 살며 종국엔 감옥에 갇힌 느낌이었달까.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심했다.
가급적 망원 일대여야 함, 성산동 선호하지 않음 - 그저 한강 공원과 멀어진다는 이유
보증금 범위
사장님이 주차는? 하시길래 지금은 없는데 나중에 살 수도 있어요 답하자 지금 없으면 없는 거야~!라는 대쪽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갑자기 신뢰가 생기며 이 부동산을 통해 집을 구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그날 당일 집을 2군데 보고, 긴가민가해서 다음 토요일에 다시 부동산에 갔다. 매물을 총 3개를 보여주셨는데 처음 본 집이 예산을 조금 초과하긴 했으나 희우정로 벚꽃길 초입으로 탁 트인 느낌에 위치가 좋았고 테라스에 방 3개, 햇살 가득한 느낌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후 본 2개는 기억도 잘 안 난다. 예산을 초과하는 게 걸리긴 했으나 이 집으로 해야겠기에 부동산에 가계약 걸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여기는 다른 부동산에 등록된 매물이라 공동중개로 들어가게 되는데 집주인이 상대 부동산에만 매물을 내놨고, 상대 부동산에서 나 이전에 집을 보고 간 분이 집을 몹시 맘에 들어해 그분이 월요일에 은행과 대출 가능여부 확인 후 가계약을 걸겠다고 했고 이에 부동산이 그렇게 하셔라, 그전까지는 다른 사람과 가계약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만약 집주인이 부동산 여러 군데에 집을 내놓았으면 그 부동산에서 그런 약속을 하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데 딱 그 부동산에만 집을 내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구두로 한 약속이라고 하지만 이미 그렇게 말을 해버린 이상 월요일까지 기다리는 게 상도라고 했다.
나는 대출도 필요 없고 당장 가계약 잔금도 치를 수 있어 부동산 아저씨의 입방정이 너무 답답했으나 어쩔 수 없다기에, 이대로는 다른 집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 월요일까지 기다려보기로 하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다.
와인 생각이 간절
대망의 월요일. 오전 중에 결과가 나온다길래 입사 면접 합격 결과 기다리듯 초조하게 핸드폰만 바라보며 오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대출이 기어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와버렸다. 오 마이 갓.
그래, 더 좋은 집 만나려고 그런 걸 거야. 하하 그럴 수 있어. 망원동 주민 되기 쉽지 않다. 흩날리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다음 주 토요일에 또 뵙겠다고 부동산 사장님께 말씀드렸고 나 못지않게 결과를 궁금해했던 회사 동료들에게 눈물을 머금고 비보를 전했다. 그런데 그날 3시, 부동산 사장님에게서 사진과 함께 문자가 왔다. 내 조건에 딱 맞는 집이 나왔다고.
사진상 집이 굉장히 어수선하고 더러워 보이긴 했는데, 그건 세입자가 청소를 안 해서이지 집 자체는 괜찮아 보여 바로 다음날인 화요일 퇴근 후 가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화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촉이 왔다. 퇴근하고 가면 그전에 집이 나가버릴 거라는. 다급히 팀장에게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당일 반차를 써야겠다고 보고한 뒤 1시가 되자마자 쏜살같이 망원으로 갔다.
사장님이 그렇게 반가워 보일 수가 없던 차, 갑자기 다른 아가씨도 반차 쓰고 보러 온다 했다고 하신다. 그 아가씨도 2시쯤 온다고 했다길래 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만약 나랑 그 아가씨 둘 다 맘에 들면 어떡해? 가위바위보라도 해야 하나? 진짜 어떡해 반차까지 썼는데? 한참 머릿속이 시끄러운 와중에 그분과 통화를 한 사장님이 그 아가씨가 시간을 착각해서 좀 늦게 오는 걸로 바뀌었다고 한다. 흡족. 그렇게 해서 집을 봤고, 집 벽 중 7개의 벽이 각각 초록, 회색, 핫핑크로 도배가 되어있어 도대체 어떤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 살았던 것인지 의문을 가지며 이 벽들에 페인트칠하는 것을 집주인이 허락한다면 계약한다고 했고, 집주인의 오케이가 떨어져 나는 그렇게 계약을 하게 되었다.
4년 전 나 혼자 처음으로 집을 계약할 때는 부동산에 있던 내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두 번째라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계약금을 치르고 근처 주민센터에서 확정일자까지 받은 뒤 망원동 새벽카레에서 맛있게 카레를 먹은 뒤 집에 돌아왔다. 서류봉투에 담긴 계약서를 내내 꼭 끌어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