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따스한 성북천, 4월마다 펼쳐지는 벚꽃이 만개한 포근한 일주일, 성북천을 따라 위치한 삼겹살 집들, 스콘의 진수를 맛 보여준 스프레드, 고즈넉한 길상사, 다정하고 초록초록한 해로커피, 자그마한 네모난 창문들이 귀여운 마찬가지로 자그마한 이음 도서관, 소금빵과 유럽빵들이 고소한 밀곳간, 성북천의 오리들, 특히 흰둥이라고 살포시 이름 지어준 하얗고 통통한 오리.
성북을 좋아하게 만든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애정 어린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성북은 잿빛이다.
나는 성북에서 크고 작은 실패와 이별을 겪었다. 어떤 이별은 후련했고, 어떤 이별은 억울했고, 어떤 이별은 잔인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즈음에 겪었던 이별과 나의 실직 상태, 코로나 당시의 무겁고 억눌린 분위기 이 셋이 맞물려 어떠한 상호작용이 있었다.
햇살 아래 산들산들 흔들리는 들꽃을, 그 주위를 나풀대는 나비를, 아장아장 걷는 내 강아지를 바라보며 걷던 날들을 기억한다. 그날들이 다시 오더라도 그때 느꼈던 행복을 전과 같은 방식으로 느낄 수는 없음을 알았을까.
그즈음부터 우울이 종종 나를 찾아왔다. 때로는 예견된,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던 우울은 나에게 찾아와 며칠씩 머물렀다.
그러한 상태에 익숙해지면서, 아니, 어쩔 수 없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나는 우울이 기저에 있는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도처에 상처받았던 내 자신의 허물이 널려있는 동네에 살면서, 매일 그 길을 걸으면서, 매일 내 자신에게 과거의 상처들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러면서 무엇이 왜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지 어떻게 깨닫지 못했을까. 그만큼 지쳤을까.
그러다 훌쩍 나는 방콕으로 갔다.
매일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했다.
노을 지는 6시, 퐁퐁 버블이 올라오는 따뜻한 옥상 자쿠지에 앉아 전자책을 읽었고 햇살 아래 유영하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높이 날아왔는지 기특해하기도 했던 기억. 프롬퐁역 엠스피어 앞에서 정신없이 반짝이는 방콕의 밤거리에 감탄했고 좋아하는 노래들을 들으며 오토바이 택시를 탔다.
그렇게 방콕에 머무는 동안 마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수영을 하던 어느 날, 수영장 옆에 심어진 꽃과 나무 위에 앉아 깃털을 가다듬는 새들을 보니 까맣게 먼지가 내려 앉은 길거리에서 지저분해진 줄도 모를 깃털로 길거리를 쪼아대던 새들이 떠올랐다. 내가 자리한 세상에만 머무른다면 다른 세상은 영원히 알 수 없겠다는 생각도.
여전히 우울은 이따금씩 나를 찾았지만 한국에 돌아온 나는 결심했다. 생각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