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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희 Jun 22. 2022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이야기

12." 킁킁 "

2014.08.27


이십 대 초반 내가 그토록 남산을 좋아하고 주변을 걸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곳에만 가면 맡을 수 있었던 냄새 때문일 것이다. 예전만큼 뻔질나게 남산을 걷진 않지만 아직도 가끔 기분전환을 하고 싶을 때 가끔 남산을 찾아가곤 하는데 몇 년 전 인가부터는 이상하게도 항상 느낄 수 있었던 그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왜 느껴지지 않는지 퍼뜩 숨을 크게 들여 마셔 보지만 그저 찬바람만 느껴질 뿐. 찬기 가시려 손을 댄 코가 예전보다 더 딱딱해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면 남산의 냄새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즘 난 통 무슨 냄새나 향기를 느끼지 못하고, 느끼더라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낸 것 같다.   

잠시 어린 시절을 보낸 남산엔 언제나 나를 편안하고 두근거리게 하는 냄새가 있었다. 원주에 가서 살다가 이따금 친척 어른을 뵈러 올라올 때 남산 동네에 발을 딛자마자 느낄 수 있었던 냄새였는데,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다른 곳에서도 맡을 수 있는 것인지 찾았었다. 다시 서울에 올라와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기쁘게도 그 냄새를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그 냄새는 각종 잡화들과 함께 채소들, 특히 양파가 함께 있을 때 나는 슈퍼마켓의 소박한 냄새였다. 그런데 모든 슈퍼마켓에서 그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다. 뭔지 아직도 모를 뭔가가 있을 테지.

왠지 모르게 기운이 솟고 활력이 생겼던 그 냄새는 어린 내 욕망과 환상과 꿈이 집결된 곳이 동네 슈퍼마켓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추측해본다. 맛난 과자와 초콜릿, 각종 군것질거리들이 넘쳐나는 곳. 이 냄새라는 것이 어쩌면 내 내부에서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무언가를 행복하게 꿈꾸고 기대할 때 특히 연관된 어떤 특정한 장소의 냄새가, 공기가 나를 두근거리고 기분 좋게 하고 각인되는 것이 아닌지. 그렇게 꽤 긴 시간 일상에 함께하는 나만이 느끼는 냄새는 내가 두르고 다니는 공간처럼 나를 에워싸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냄새 공간은 삶의 색깔이 조금씩 바뀔 때마다 달라진다.

요즘 내가 어떤 냄새도 인상적이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은, 냄새를 정말 못 맡는다는 것이 아니라 냄새 공간이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걸 다시 말하자면, 왠지 좀 슬픈 이야기이다.


워크숍에서 일을 돕다가 참여자 한 분께 새끼손가락만 한 병에 담긴 향수를 선물 받았다. 각 다른 선생님들께도 어울릴만한 향으로 담아서 선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에게서 여느 때와 같이 각종 화장품 향기가 뒤섞여 났다. 컬러가 강렬한 화장품들을 선호하는 그분은 마지막 전시로도 립스틱을 활용한 작업을 내놓으셨다. 기쁘게 받은 향기는 재스민 향이었다. 차분한 향기가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향수가 담긴 작은 통이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되면서 여기에 조금씩 좋은 향을 담아가지고 다니면서 기분 전환할 때 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떤 좋은 향이라도 뭔가 공격적인 진한 향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요즘 생각을 하면 정말 감사한 선물이었다. 어쩌면 그분은 나름대로 삶의 에너지를 찾기 위해 향기 나는 것들로 자신과 주변을 꽉꽉 채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조금 건조하겠지만, 나는 나의 냄새 공간을 일부러 채우지 않고 많이 비워두고 싶다. 내가 진정 두근거리고, 행복한 꿈을 꿀 때 또 어떤 나만의 향기가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겠지.      

[출처] 12.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얘기 - " 킁킁 "|작성자 onlyweek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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