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독일에서 만난 여덟 마리의 달팽이

잠이 쏟아지는 10일 차.

by 북극성 문학일기

독일에 온 지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저 잠만 쏟아지던 날이기도 했다.


독일에 온 첫날도 흐릿한 날씨였는데 10일째에도 마찬가지였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빠지지 않았고 이 날도 역시 비가 내렸다. 학교에 볼 일이 있는 친구를 따라 아침부터 동네를 걸었다. 어쩐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다. 오른쪽 발이 갑자기 아팠고 절둑거리기까지 했다. 빨리 집이나 가고 싶었다.


대학교를 둘러볼 여유도 거리 풍경을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던 나는 핸드폰 게임을 하며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을까. 그제야 좀 둘러볼 마음이 생겼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허리나 펴보려고 스트레칭을 하려고 하는데 문득 작은 생명체가 눈에 보였다. 한국에서 흔히 봤던 달팽이보다 조금 더 큰 달팽이들이다. 비가 왔고 습해서 그런지 달팽이들도 동네 마실을 나온 모양이다.


스무 번 정도 오르면 끝인 계단에 여러 마리가 붙어있었다. 낯선 곳에서 본 익숙한 생명체가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한 마리가 또 보였다. 또 찍었다. 얼마 못 가서 또 발견했다. 그렇게 집까지 오는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총 여덟 마리의 달팽이들과 조우했다. 독일, 달팽이의 나라이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고 뜨끈한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뱃속이 따듯해지고 친구도 나도 잠이 들었다. "한 시간 뒤에 깨워줘."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분명 자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꿈 한번 꾸지 않고 그렇게 오후 내내 자다가 9시가 되어서야 다시 깨어났다. 잠만 쏟아졌다. 시차 적응은 끝난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장기간 비행을 이번에야 처음 해본 거라 이게 시차 탓인지 아니면 그저 졸렸던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독일에서 한 달을 사는 나는 이제 여행의 3분의 1을 끝냈다. 잘 버텼다는 안도감 한 스푼,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다는 허망함 한 스푼, 뭔가를 얻어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한 스푼이 모여 몽롱한 잠의 묘약을 만들었다. 코로나 시국에 독일에 왔기에 긴장감은 늘 마음 가득 있었다. 그러다 10일이 된 오늘 그 그 마음이 탁 풀린 거다. 여러 복합적인 마음이 나를 잠으로 이끌었다.


독일, 이곳에서 나는 달팽이와도 같다. 집 밖을 나가면 온통 독일어로 쓰인 가게, 독일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가득이다. 당연하게도 외국이기에 이런 거지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느릿느릿 핸드폰 지도를 보며 이동한다. 또한 누군가 독일어로 간단하게 말을 걸어도 내 머리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누군가에게 길을 비켜줬다. "고마워"라고 말하고 간 그에게 나는 "비테 쉔"이라고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지만, 그는 이미 떠났다. 마치 노트북을 다시 켤 때 로딩이 걸리는 느낌이다.


빠르게 적응하고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지만, 내가 이곳에 와서 적응하고자 애쓰는 일들은 사실 한국에서는 쉽게 해왔던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익숙했던 일을 이곳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익숙해지고자 노력한다. 아주 느릿하게 외국어로 말을 건네고, 느리지만 최선을 다해서 상황을 이해하고자 애쓴다. 어떤 일들을 그토록 긴장하면서도 뿌듯한 마음으로 했는지 그 처음을 공유하고자 한다.



1일 차

처음으로 독일에 도착해서 입국 심사를 마쳤다.

처음으로 전철 티켓을 구매해 전철을 탔다.

처음으로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2일 차

처음으로 독일에서 버스를 타봤다.

처음으로 시내에 나가봤다.

처음으로 옷가게에 갔다.

처음으로 서점을 구경했다.

처음으로 아시아 마트에 갔다.

처음으로 복숭아를 먹어봤다.

처음으로 염색약을 사서 염색을 했다.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물건을 찾고 있다고 물어봤다.


3일 차

처음으로 치즈를 구매했다.

처음으로 공원 산책을 했다.

처음으로 식당에 가서 메뉴를 시켰다.

처음으로 생맥주를 마셨다.


4일 차

처음으로 공유 자전거를 발견했다.

처음으로 공유 자전거를 바로 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독일 자전거 본부에 전화했다. (그러나 소통이 어렵다는 걸 깨닫고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끊어버렸다.)

처음으로 30분 정도 짧게 혼자 동네 산책했다.


5일 차

처음으로 빨래를 했다.

처음으로 공유 세탁기와 건조기를 이용했다.

처음으로 바질 페스토 리조토를 만들었다.


6일 차

처음으로 전철 타고 옆 동네 (비스바덴)에 갔다.

처음으로 보라색 흐드러진 라벤더를 봤다.

처음으로 레몬 에이드를 만들었다.


7일 차

처음으로 혼자 빵집에 가서 빵을 샀다.

처음으로 혼자 시내 구경을 했다.

처음으로 혼자 자전거를 탔다.

처음으로 혼자 박물관에 가서 티켓을 구매했다.

처음으로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물어봤다. (비록 바쁘다고 갔지만..)


8일 차

처음으로 뮤지엄에 갔다.

처음으로 식물원에 갔다.

처음으로 음식을 픽업해봤다.


9일 차

처음으로 혼자 자전거를 타고 강을 따라 달렸다.

처음으로 유명한 맛집에 가서 음식(슈바인 학센)을 먹었다.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10일 차

처음으로 온종일 잠을 잤다.


저녁을 겨우 먹고 다시 아침에 본 달팽이를 생각했다. '난 오늘 자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 돈과 시간을 들여서 힘들게 온 독일에서 그저 잠만 잔 나를 원망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익숙했던 일들을 느리지만 다시 새롭게 시도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도전이었다. '처음으로' 하나하나의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느려도 멈추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는 독일 친구의 말처럼 계속 일상 속에서의 '처음'을 시도해가고 싶다.


한국에도 독일에도 달팽이들은 있다. 달팽이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건 느릿느릿한 내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 시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시기든 달팽이 같은 시점은 모두에게 있지 않을까. 비록 이렇게 적응을 끝날 때 즈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벌써 아쉽지만. 괜히 달팽이들에게 애틋한 감정이 생겨버렸다. 비로 인해 땅이 축축해진 어느 날, 한국에서 달팽이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독일에도 비 오는 날이면 너희처럼 동네 마실을 나오는 달팽이들이 있다고.'















keyword
이전 12화#11. 저 여유로운 풍경은 나의 것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