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는수밖에 없어
"이번 정류장은 국립수목원입니다."
국립수목원행 버스. 교환학생 포기서를 학교에 제출한 지 1시간도 안 지난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푸르고 광활한 숲, 그리고 나를 반길 새소리. 그 모습을 상상하며 지친 몸을 이끌었다.
올해는 꼭, 독일을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대외활동도, 아르바이트도, 앞으로의 미래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렇게 2021년 2월을 맞이했다. 코로나로 교환학생을 포기한 지금, 다시 힘을 내야만 했다. 우선 대학교 복학을 신청했다. 이미 교환학생 준비로 1년을 휴학해서 이제 돌아가야만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의 압박감에 힘든 순간에는 늘 가본 적도 없는 컴컴한 저수지를 떠올렸다. 물이 아주 깊어서 내려다봤을 때는 어둠 그 자체인 그런 저수지. 머릿속으로는 늘 그곳으로 도피했다. 올해 나에게 그런 존재는 바로 수목원이었다. 마음이 지칠 때 늘 수목원을 떠올렸다. 한적한 곳에서 걷는 상상을 하다가 포기서를 낸 오늘에서야 직접 가자고 결심한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니 예상외로 금방 도착했다. 그러나 내리면서도 이곳이 정말 맞나 싶었다. 내 상상 속 수목원은 이런 곳이 아니었다. 푸릇푸릇한 나무가 가득한 곳. 그 속에서 천천히 걷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2월. 봄이 되려면 한 달이나 남았다. 게다가 어제까지만 해도 한파였다. 오늘부터 날씨가 좀 풀린다는 뉴스가 나오는 시점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휑한 느낌이 들었다. ‘앗. 이건 좀 아닌데?’ 싶었지만 우선 걷기 시작했다.
볼에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의 감각을 느끼며 그렇게 혼자 걸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걷는 내내 사람을 만나는 건 드물었다. 평일 오전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톤이 다운된 거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강렬한 색감의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기대한 나는 무채색의 세계로 진입했다. 주변에는 마른 나뭇가지가 나뒹굴고, 아직 채 녹지 않은 회색빛의 눈도 보였다. 게다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약간은 쓸쓸하기까지 했다.
탁 트인 하늘. 나무가 끝도 없이 높은 거리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이 많았다. 워낙 큰 나무라 그런지 줄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보이지는 않지만, 딱따구리, 까마귀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잎이 없어서 그런지 수명이 다한 고사목도 더 잘 보였다.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수목원은 상상만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표지판에는 들어본 이름보다는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 많았다. 그러나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나무였다. 잎은 없고 나무 기둥만 보였으니까. 나무가 아닌 식물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비쩍 말라붙은 잎만 있다던가 아니면 그마저도 아예 없었다. 텃밭 하나 전체에 표지판만 여러 개, 그냥 흙만 가득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있기는 했겠지?’ 의심스럽긴 해도 줄기, 이파리 등 조금씩 단서는 발견할 수 있었다.
이왕 왔으니 재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기대와는 달랐지만, 꽤 즐거웠다. 우선 넓은 수목원을 대여한 것만 같은 한적함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표지판을 보며 잠시 탐정 놀이를 했다. 표지판을 보며 봄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갈피나무: 잎은 손바닥 모양 겹잎이고, 꽃은 자주색으로 8~9월에 핀다.
전고사리: 부드러운 털이 있다.
계수나무: 꽃과 잎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고, 단풍은 노란색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식재한다.
전나무: 열매는 원주형의 밝은 갈색으로 위를 향하여 달림.
상수리 나무: 잎 가장자리에 예리한 톱니가 있음.
지금은 떨어진 잎으로만 유추할 수 있는 모습을, 글을 읽으며 그 자리에서 바로 상상했다. 앙상한 가지에 손바닥 모양의 노랑 잎이 자라났다. 나무 근처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꽃내음을 맡은 나비들이 거리를 나풀거리며 돌아다닌다. 가을이면 이 나무에는 빨간 단풍이 달리고, 나는 그 아래에서 곳곳에 떨어진 단풍을 그러모아 책 사이에 낀다.
이번에는 ‘봄에 새순이 돋아날 때의 생동감’이라고 적혀 있는 양치식물을 소개하는 문구 앞에도 다가간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흙 위로 고사리도 심어보고, 바위 위에 붙어 있는 밝은 연두색의 양치식물도 곳곳에 추가한다. 이번에는 장소를 이동했다. 아직도 꽁꽁 얼어있는 강에 얼음을 걷어내고 흐르게 한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물 위를 떠도는 오리들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는 언제나 부족하다. 늘 완성된 모습 자체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열매와 꽃에서 나는 단내를 맡고 싶다. 푸르른, 어둡고 건조한 진녹색보다 밝은 연두색이 가득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볼을 차갑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보다는 볼을 간지럽게 부비는 바람이 좋다.
한편으로는 겨울이 정말 숲의 입장에서는 좋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게 된다. 봄과 여름은 식물 대부분이 힘을 내야만 하는 시기이다. 힘을 내서 잎을 만들어 내고, 꽃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힘을 내고 난 뒤에 가을과 겨울은 다시 힘을 빼는 시기. 다시 봄과 여름을 위해 상상을 하는 시기이다. 내 몸에 다시 자라날 잎을 만들어 내고, 새로 생길 가지의 모양도 디자인해본다. 햇살, 바람과 만나서 달라질 모양과 색은 적어도 나무의 몫은 아닌 거다.
나무뿐만이 아니다. 씨앗도 마찬가지이다. 씨앗은 응축된 세계이다. 그에게 토양과 위치는 정해 졌지만, 앞으로의 그가 어떻게 클 것인지에 관한 설계는 오직 그만이 디자인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겨울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많은 꿈이 자라고 있을 겨울의 끝자락에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왔다.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수목원에서 발견하고 왔다. 봄이 되기까지는 아직 쌀쌀하다. 그렇지만 가끔 이렇게 산책하며, 오늘의 겨울을 안온하게 보내고 싶다. 이런 다짐을 해도 내일이면 또 조급해질 게 사람이지만.
올해 다짐한 게 있다. 국립 수목원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맞이하는 것이다. 겨울과 봄엔 이미 방문했으니 이제 남은 건 가을과 겨울! 올해만큼 계절의 변화를 잘 느꼈던 시기가 있나 싶다. 나무 관찰을 겨울에 시작해서일까. 시간이 지나며 잎이 생기는 그 모습들이 무척 신기하다. 잠시 관찰을 놓쳤다가 문득 또 바라보면 어느새 풍성해져 있는 잎과 꽃.
봄에 다시 방문했을 때 본 국립수목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모습이었다. 내 상상력이 이렇게 빈곤했나 싶을 정도로. 여름과 가을에 변화해 갈 수목원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https://kna.forest.go.kr/kfsweb/kfs/subIdx/Index.do?mn=UK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