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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Sep 24. 2021

엄마 뭐가 중요한지 정말 모르세요?

길고 긴 추석 연휴가 끝이 났다. 남편의 연휴는 23일까지, 아들이 온라인 수업을 듣는다고 하지만 내 마음의 연휴는 남편이 출근을 한 오늘에야 끝이 났다. 연휴기간 동안 남편과 교대로 밥을 하긴 했지만 매 끼니 내 가장 큰 고민은 뭘 먹느냐는 것이다. 추석 전 오른 물가 탓에 냉장고는 가난하다. 냉동실을 파먹기 시작했다. 생선도 굽고 만두도 굽고 얼린 옥수수를 해동해서 먹기도 했다. 이제 정말 더 파 먹을 것도 없다. 장을 보러 가면 되겠지만 추석 연휴 끝이라 그런지 동네 마트에는 더 비싸게 주고 사기에는 물건이 좋지 않다. 대파 한단이 3500원인데 상태가 누렇게 시들어서 손이 가지 않았다. 오이도 파프리카도 비싸진 만큼 물건은 별로였다. 비싸게 사는 만큼 더 좋은 것을 사고 싶은 내 마음 탓에 최소한의 것만 담아왔다.


남편은 컴퓨터로 워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뭐가 안되는지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코로나전까지 컴퓨터를 혼자 켠 적도 없던 아들은 이제 우리보다 컴퓨터를 더 잘 다룬다. 문서작업 중에 도표를 그리는 작업을 하는 아빠를 아들은 능숙하게, 답답해하면서 돕고 있다. 점심을 준비해야 하는데 두 사람은 컴퓨터 앞에서 심각하다.


내가 메뉴를 고르기 힘들 때 하는 방법은 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아들이 먹고 싶다고 하는 것으로 준비하면 고민도 없고 간단하다. 설령 집에 재료가 없으면 마트에서 사 와서라도 해주면 된다. 몸이 하는 일은 간단하다. 문제는 머리로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머리가 하는 어려운 일을 아들에게 맡긴다.


"아들 점심에 뭐 먹고 싶어?"


말이 없다. 도대체 컴퓨터에 무슨 일이 있기에 두 사람에게 내 목소리가 가닿지 않는 것일까?


"아들 점심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없어요."


아들의 답은 시든 대파 같다. 아들이 답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내가 해결해야 하는데 아 생각하기 싫다. 점심메뉴 고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아들 지금 점심을 뭘 먹어야 할지에 대한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엄마 혼자 풀고 있어. 엄마도 좀 도와줘."


나는 목소리를 살짝 높여서 말했다. 아들은 처음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엄마 지금 뭐가 더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아니 알겠는데. 한 시간 안에 점심을 해야 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어딨어?"

"에휴!"


아들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매우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점심을 뭐로 먹을까 하는 문제는 오늘 하루만 영향을 주는 문제지만 아빠의 문서작업은 앞으로 계속 영향을 주는 문제예요. 점심 한 끼 맛없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아빠의 문서작업보다 점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아들은 조근조근 우는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요즘 아들은 말로 엄마를 때린다.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것도 아닌데 아들과 말을 하다 보면 말문이 막히고 기가 찬다. 반박하고 싶은데 아들의 말이 논리적으로 더 맞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말을 못 한다. 나는 감정의 흐름대로 말을 하는데 아들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을 한다.


며칠 전 아들의 학교에서 천연수세미로 설거지하기라는 숙제가 있었다. 아들은 고무장갑을 끼고 알맞게 자른 수세미에 세제를 풀어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천연수세미라 거품이 안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품도 많고 설거지도 편했다. 천연수세미를 써야지 하면서도 잘 안 닦일 것 같아서 망설였는데 앞으로는 천연수세미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설거지를 뽀득뽀득 공들여하는 장면을 찍어서 과제 게시판에 올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설거지 그만해도 된다고 말했다. 유리잔과 깨지기 쉬운 접시가 많아서 사진 찍으면서도 불안했다. 이제 속 편하게 내가 마무리하고 싶었다.


"설거지하는 장면 사진만 찍고 설거지를 그만하는 것이 이 과제의 목적이 아니에요. 천연수세미를 이용해서 설거지를 하는 것이 과제라고요."

"네 말이 맞는데 깨질까 봐 그러지."

"엄마 아직 깨지도 않았는데 미리 깰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그리고 엄마도 설거지하다가 접시를 깨기도 하잖아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설거지권을 되찾은 아들은 설거지를 계속했다. 나는 아들이 접시를 깰 것 같아서 불안했다. 고무장갑을 낀 아들의 손에서 접시들은 위태하게 움직였다. 나는 헹구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아들 옆에서 접시를 헹구기 시작했다. 설거지 연출사진만 찍으려고 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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