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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06. 2021

아들은 일상을 쥐어짜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일주일에 3편의 일기를 써야 한다. 코로나로 친구들을 만나거나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아들의 일기는 매번 비슷한 내용이다. 아들의 일기를 채우는 것은 대부분 길고양이 이야기다. 아파트를 산책하면서 친구들보다 자주 만나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길고양이들이 많아서 매번 만나는 고양이들도 다르고, 같은 고양이라고 해도 미세하게 다른 놀이를 한다. 아들의 일기는 길고양이들과의 만남과 교감, 자세히 봐야 찾을 수 있는 미세한 차이로 채워지고 있다.



이제 고양이 이야기도 한계에 부딪친 것 같다. 아들은 좋아하는 길고양이 월드컵을 일기에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엄마인 나의 이야기를 자신의 일기에 쓰기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아들은 일상을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일상이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예전에도 아들은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나는 자주 아들의 일기를 보면서 깔깔 웃었다. 자주 캠핑을 가고,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것들로 일기를 채워갔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일상이란 삼시세끼 밥을 챙겨 먹고, 학교다니고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일상은 이것들을 제외한 것들이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여름에는 계곡이나 하물며 동네 놀이터 분수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삶이 일상이다. 도서관에 가면 책만 빌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 머물면서 이 책 저 책 꺼내 보는 재미가 있는 것이 일상이다. 딸기가 제철이면 친구들과 딸기농장에 가서 딸기도 따고, 딸기잼을 만들어서 농장 사장님이 주신 식빵을 찍어먹으면서 웃는 것이 일상이다.


친구들과 캠핑을 가면 친구들의 텐트에서 뒹굴뒹굴 과자도 먹고 게임도 하는 것이 일상이다. 지금처럼 시원한 가을 저녁에는 친구들과 신나게 공차기를 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흘린 땀을 식히는 것이 일상이다. 아들은 이 모든 일상이 없는 하루하루를 일기에 써 내려가고 있다. 아직도 일기 숙제를 해야 할 날이 몇 달이나 남았다. 아들의 일기는 짜도 물 한 방울 안 나오는 빨래를 쥐어짜고 있는 느낌이다. 힘은 드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다.


아들의 일기를 보면서 내가 아들을 무료함의 감옥에 가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로나라고 해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알려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코로나 초기에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나 놀이를 위한 재료들을 사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치 내 몸도 마음도 코로나에 익숙해지다 못해 매일 마시는 공기조차 코로나 공기, 그 공기를 마신 나도 코로나를 가득 머금은 거대한 풍선이 된 것 같다. 아마 자세히 표현은 못하지만 아들도 비슷한 기분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애를 쓰고 쥐어짜도 코로나밖에 나오지 않는 일상을 아들은 오늘도 쥐어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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