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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a Oct 17. 2024

한봄의 산책절

걸음을 시작하던 어느 봄날

2023년 1월, 나는 2년 조금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새로운 분야를 도전하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퇴사 사유였지만 그 시기 즈음에 나는 우울증이 다시 심해져서 정신과를 다녀야 하는 상태였다. 회사 환경은 좋았으나, 2018년부터 얻은 우울증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단약 (정신과 약을 그만 먹는 것)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직장인으로 사는 2년 몇 개월 동안 일에 과몰입하느라 우울증 치료를 뒷전으로 뒀다. 그때 나는 우울증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생각(착각)했다. 병원에서는 새로운 시도는 개뿔이고 우선 쉬면서 치료에 전념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공백기가 시작됐다.


2월과 3월에는 계속 집에서 칩거하며 누워 있었다. 퇴사를 하고서 긴장이 풀린 것인지 아니면 번아웃이 온 건지,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눕는 일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퇴직금으로 거의 매일 배달음식을 먹으며 퍼져 지내는 삶을 지속했다. 백수다 보니 잠 패턴도 불규칙해졌다. 나는 새벽까지 폰을 하릴없이 스크롤링하다 교대하듯이 뜨는 아침 해와 하이파이브하고 잠들었다.


3월 21일, 오전 7시에 불현듯 눈을 떴다. 2시간 정도밖에 못 자고 갑자기 깬 상태였다. 실은 불면증에도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중간에 깨는 날들이 허다했다.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소라면 다시 잠들기 위해 뒤척이다 정오 넘어서 잠에서 깰 터였다.


그날따라 깨어난 내가 침대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너무 꼴 보기가 싫었다. 이대로 다시 잠들면 어제, 그저께, 지난주, 지난달과 다름없는 생활을 할 게 뻔했다. 억울했다. 뭔가에 홀린 듯,  침대에서 슬금슬금 일어나서 옷을 챙겨 들고나갔다.




아직 봄꽃이 피기 전이라서 그런지 아침 바람이 꽤 쌀쌀했다. 점퍼 지퍼를 목까지 꽉 채워놓고 단지를 나섰다. 4년 전에 지금 동네로 이사 왔지만 이곳을 제대로 걸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네를 탐색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었다. 아직 벚꽃은 제대로 피지 않았지만 바람에서 봄냄새가 났다. 걷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동네에 있는 공원 입구에서 발걸음이 멈춰 섰다. 새삼 생각을 해보니 공원조차 제대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햇살이 딱 알맞게 내려서 공원의 풀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들어오라는 계시로 생각했다. 어느새 공원 안쪽을 돌고 있었다.


부스럭-


공원 바닥은 가을에 떨어지고 겨울에 말라붙은 낙엽들이 카펫을 이루고 있었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아직 잎사귀가 나지 않은 앙상한 나무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


고양이였다! 댕그란 초록빛 눈과 마주쳤다. 고양이는 활짝 열어젖힌 턱시도 무늬를 지녔고, 꽤나 오동통하고 든든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입으로 소리 내며 손짓을 하니, 고양이가 내쪽으로 찬찬히 다가왔다. 꼬리는 직선으로 오뚝 서 있었다 (고양이들이 기분 좋을 때 나타내는 꼬리 모양이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보스락 보스락 작은 소리가 나는 것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폰으로 열심히 촬영했다.



영상을 찍다가 웃음이 터져버린 바로 이 장면.

고양이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몸을 푸르르 푸는 것이다. 드릴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몸을 턴 고양이는 다시 내 쪽으로 와서 몸을 내 다리에 비볐다. 마침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닭가슴살을 몇 개 챙겨 온 터였다. 한 개를 까서 주니 턱시도 냥이는 그 자리에서 찹찹 간식을 씹어 넘겼다.


한 10분 정도 쭈그린 채로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다리가 저려서 일어섰다. 내가 간다는 것을 아는 눈치인지, 고양이는 몇 걸음 앞서서 가다 풀썩 앉았다. 나를 배웅하는 듯했다.

"우리 왠지 자주 만날 것 같네. 또 보자."

웃으며 말을 건네니 고양이는 '애옹' 화답을 했다. 그는 멀어져 가는 나를 제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첫 동네 산책은 그렇게 30분 정도로 끝이 났다. 공원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내 안이 봄 공기로 가득 충전된 듯했다. 그리고 체력은 반대로 방전이 됐다. 집에 오자마자 피곤해져서 바로 침대로 엎어졌다.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일어나서는 약 두 달 만에 배달 음식 대신에 집밥을 먹었다. 청량한 아침 공기로 채운 몸과 마음을 정크푸드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턱시도 냥이를 또 볼 수 있다면 매일 7시에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잠들기 전에 가방에 닭가슴살을 여러 개 챙겨 넣었다. 


3월 21일, 나는 이 날을 산책절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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