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베란다 없는 아파트에서 베란다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대부분이 거실 확장형이라 베란다 있는 집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떻게든 싱그러움과 향기가 가득한 미니 식물원을 만들 베란다가 있는 집을 꼭 찾겠다는 각오로 발품을 팔았고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부자 되고 싶은 마음에 산 금전수.
크고 멋진 자태가 맘에 들어 산 야자수.
가게마다 집마다 있기에 그냥 산 고무나무.
잎이 넓어 공기정화에 좋을 것 같아 산 극락조.
하늘로 뾰족하게 뻗은 연두색이 너무 예뻐 산 율마.
요리하다 필요하면 쓰려고 산 허브.
온갖 이유로 베란다는 식물들로 채워졌습니다.
아 오렌지 자스민까지요.
오렌지 자스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오렌지로 시작하는 이름이니 분명 주먹만 한 오렌지가 열리겠지? 집에서 신선하게 오렌지를 먹을 수 있겠네? 라는 1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식물 초보였거든요. 손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묘목이었는데 대체 얼마나 오래 키워야 주먹만 한 오렌지가 열리는지 가늠도 못 하는 식물 초초초보였지요.
잘 키워보려는 마음과 달리 율마는 한 달도 안 되어 죽었습니다. 수분과 통풍에 예민한 율마는 초보인 저에게 너무 벅찬 아이였어요. 3년을 버티던 금전수도 얼마 전 죽었고요. 부자 되고 싶었는데.. 안녕 나의 꿈.
몇몇을 살초 하긴 했지만, 식물 애호가로서 자질을 인정받은 게 있으니 바로 홍콩야자와 극락조입니다. 본디 혼자서도 잘 크는 종인지 내가 잘 키운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린아이 크듯 무럭무럭 자랐어요. 손바닥만 했던 홍콩야자는 지난가을 중형 화분 3개에 나눠 분갈이해 줄 만큼 자랐고 극락조 또한 꽃가게 사장님에게 칭찬받을 정도로 잘 컸어요. 눈에 띄는 성장 속도에 식물을 보는 재미와 가꾸는 재미 또한 좋았어요.
죽지 않고 잘 버텨준 식물들이 빠른 성장을 하는 가운데 조금 특별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렌지 자스민이에요. 다른 식물들에 비해 성장이 아주 느렸거든요. 오렌지가 열리려면 엄청나게 큰 나무로 자라야 할 텐데 아직도 손 한 뼘 크기이니 이러다간 오렌지는커녕 곧 죽을 것 같았어요.
더딘 성장에 아니 곧 안녕을 고해야 할 것 같은 외관에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나의 무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목숨을 유지하더니 1년이 지났을 때쯤 작고 하얀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개화에 감격스러웠어요.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거늘 이 작은 꽃이 대견하여 보고 또 보았습니다. 향은 또 얼마나 강한지 꽃이 피어 있는 내내 독특한 향이 사방에 퍼졌어요. 그 이후로 분기별로 꽃을 피워 즐거움을 선사하더니 어느 날엔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제야 오렌지 자스민에 대해 검색했어요. 원래 오렌지 모양의 작은 열매가 맺히는 식물이었어요. 베란다 창문을 뚫을 만큼 가지가 자라면 어떡하지? 큰 나무가 되면 시골 밭에 옮겨 심어야 하나? 나무 하나에 오렌지가 열 개는 열리겠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과 기대를 할 필요가 없는 종이었죠. 비록 나의 기대와 환상이 깨졌지만, 새끼손톱만 하고 투박하게 생긴 초록 열매는 식물 키우는 재미의 정점을 찍게 했습니다.
오렌지 자스민은 추위에 약해 겨울엔 실내에서 키워야 한다는데 추위에 적응시키겠다고 올겨울 내내 베란다에 두는 무지함을... 그럼에도 오렌지 자스민은 나의 무지를 탓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더군요. 며칠 전 환기하다 열매가 열린 걸 발견하였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많이 열렸더군요. 초록 열매가 잘 익으면 새 빨강으로 색을 바꾸는데 초록 잎과 대비되어 산뜻하고 경쾌한 그림을 선보입니다. 그 모습이 어서 보고 싶어 빨리 익기를 바라다가도 다시 열매가 열리려면 한참이 걸릴 테니 지금의 초록도 충분히 감상해야 합니다.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세찬 바람이 들어와 식물들의 잎사귀들을 흔듭니다.
추위에 떠는 오렌지 자스민을 보며 혼잣말이 나왔습니다.
"너도 참 열심히 산다. 덥든 춥든 내가 보든 말든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고 익히고. 네 본분에 충실하게."
혼잣말이 순간 나를 톡 건드렸습니다. 갈팡질팡, 고민만 하는 나의 본분은 무엇이고 충실히 하고 있느냐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느냐고.
향이 강하고 좋아 천연 방향제 역할도 하고 열매는 차로도 우려먹을 수 있다고 하니 여러모로 이로운 식물입니다. 비록 본래의 바람처럼 오렌지는 못 먹지만 다른 기쁨을 주는 나의 오렌지 자스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