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편 - 제주에 눈이 왔어요
제주는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실은 어젯밤부터 내렸다. 아니, 눈이 내렸다기보다는 날아다녔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나무에는 눈의 기척도 남지 못했다. 굵은 둥치의 귤나무 잎사귀 위에만 흔적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지붕에서, 나무에서, 도로에서 날아온 눈들이 마당의 마른 잔디 위에 쌓였다. 그렇게 쌓인 눈으로도 창밖 풍경을 온통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방학이라 조금 늦잠을 잔 어린이는 아침부터 창가를 서성였다.
샐러드에 달걀이었던 아침 메뉴는 차가운 눈 풍경에 따끈한 콩나물국으로 바뀌었다. 따뜻한 국물에 밥을 말아 짭짤하고도 달콤한 어묵 볶음을 얹어 먹은 다음 아이와 함께 아침 상을 치웠다. 올 방학부터 아이는 혼자 집안일을 하는 법을 하나씩 배울 거다. 오늘 배울 집안일은 식기세척기 돌리는 법이다. 학교에서 자기가 먹은 식판 설거지를 하기 때문에 나름 설거지에는 익숙하지만 식기세척기를 만지게 해 주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약간은 서툰 동작에서 엄마가 자기를 믿고 식기세척기를 맡겨 주었다는 뿌듯함이 묻어난다. 그 뿌듯한 표정을 마음에 담고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창밖을 확인한 다음 모자와 장갑, 목도리로 단단히 무장하고 산책을 나섰다. 바람에서는 눈 냄새와 비에 젖은 흙냄새가 풍긴다. 신나게 길을 나선 우리집 개 양갱이도 길가에 소복이 쌓인 눈더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설설 기어가듯이 큰길을 지나다니는 차가 몇 대 있을 뿐 우리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개도, 고양이도 없다. 이 하얀 세상에 오직 우리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저 멀리 평소보다 색이 옅은 겨울 바다가 보인다.
비탈길에서는 양갱이 줄을 꼭 잡고(“양갱아, 양갱아? 당기면 안 된다니까!”) 온몸을 긴장시키고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지만 이제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괜찮은 흙 공터에 가서는 소리를 지르며 마음껏 뛰어다녔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시린 공기에 폐가 아프지만 손끝발끝까지 따스한 열기가 퍼져 나간다. 열기를 만끽하며 고삐 풀린 망아지의 기분에 대해 망상하고 있으려니 옆에서는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양갱이를 데리고 있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엄마한테 공격이 집중된다.
마음껏 던지고 맞춰도 조금 차가울 뿐 무해한 무기로 싸우는 무해한 싸움. 눈이 충분히 쌓였을 때만 누릴 수 있는 사치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눈이 내리면 어쩐지 주위가 고요하다. 눈이 쌓이고 소리가 달라졌을 뿐인데도 매일 산책하며 평소에 보던 풍경이 새삼 낯설다. 마치 여행의 한 순간 같다.
두 팔을 활짝 펴고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이 순간의 감각을 몸속 깊이 새려 놓으려 한다. 피부에 시리게 닿는 찬 바람과 어딘가 낯설고 색다른 냄새와 눈에 흡수되어 반향 되는 바람 소리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고요를.
다음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눈덩이가 날아들었지만.
도발에 응해 반격을 시도한다. 무해한 무기로 평소와는 다르게 마음 높고 공격성을 발휘한다.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팔다리를 우습게 휘두르며 뛰어다니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수 없다.
다 젖고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했다. 여행 중에 이런 순간을 맞이했다면 아마도 그날은 여행에서도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라고. 이렇게 제주를 여행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 눈이 엄청 많이 왔던 날 사람 하나 없는 눈밭에서 마구 뛰어다니며 놀았던 순간을 두고두고 곱씹어 이야기하고 기억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의 내게 이곳 제주는 내 삶의 터전이고 내 일상이다.
그동안 일상의 공간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놓쳐 버렸던 특별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이 쌓였던가?
어쩌면 그래서 나는 매일 여행을 하고 있다. 혹은 하려 한다. 낯설고 설렘이 가득한 곳에서든,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든 지금 여기에서밖에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순간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 순간을 발견하여 한껏 누릴 수 있도록 나만의 안테나를 세심하게 다듬고, 언제든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익히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