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다

어슴푸레한 꿈

by 한 율
한 율 - 나는 바다 (2019)


나는 바다

한 율


나는 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언덕 아래

고요함까지

원하던 바다


말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한없이 부서져야 했던 파도

알갱이마저 부서지는 느낌이

나를 잃는 것만 같아

파도를 싫어했었지


나는 바다

깊은 곳의 끝

검푸른 구덩이 안

메마른 소용돌이까지

그것마저 내가 원하던 바다


사진: bbbbangtae, 편집: 한 율


나는 바다, 그 이야기.


그는 어느 날 문득 그 바다를 다시 느꼈다.

집어삼킬 듯한 집채만 한 파도가 갈색빛의 거대한 암벽을 휘감던 그날.

금방이라도 굵은 장대비가 그의 헝클어진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날씨.

신기하게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빗방울마저 검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걸까.

소용돌이치는 회색빛 세상이 그를 집어삼킬 듯 맴돌고 있었다.

깊은 바다.

그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바다를 본 적 있나요.

그때 처음 본 공포감마저 집어삼켜버린 어두운 잿빛.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세찬 물살들.

바람과 같은 결을 하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방향을 틀어 억세게 휘몰아치는 회색 파도.

암전 된 듯한 풍경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살기를 느꼈다기보다, 단지 살기를 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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