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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다 Dec 01. 2021

회사 5일 다니고 퇴사한 이야기

직장수난시대 #9

* 따끈따끈한 실화 스토리, 맞습니다.


국민 취업지원금을 신청했다. 선생님께서 인턴형으로 들어가면 중간에는 월급으로 받고, 3개월 인턴이 끝나면 또 남은 기간의 국민 취업지원금이 나온다며 인턴을 해보는 게 어떻냐고 의사를 물으셨다. 나는 빨리 일하고 싶어 강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명확했다. 편집자. 나는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일을 시작하게 되기까지는 일사천리였다. 다만 전화로 면접을 보는 부분이 조금 신기했다. 줌도 아니고 정말 목소리만 듣고 출근하게 되었다. 편집팀에 들어가 처음 하는 일에 괜히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왠 걸. 5일째 되는 금요일에 좋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이제껏 여러 회사를 다녀봤다. 출판사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었다. 보험회사에서도 일했었고, 카드사, 신용평가사, 여행사 등등 중구난방이지만 여러 회사의 형태를 보았다. 그런데 이런 곳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시작은 이러했다.


근무 첫날의 오후 3시에 디자인을 맡아서 했다. 편집팀이긴 하지만 인턴이니까 팀 상관없이 다 맡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무슨 외주를 맡겼는데 개판으로 해왔어요. 모다 씨한테 어떻게 만들려는 건지 정리해서 ppt로 보낼 테니까 그대로만 해줘요."


원하는 모양을 정확히 말하셔서 맡긴 디자인을 최대한 요구하신 방향으로 만들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우선 만들고 다음 날에 다시 와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표님도 6시가 되니 앞으로도 늦게 퇴근할 일을 대비해 오늘은 그만 일찍 퇴근하라고 하셨다(대표님은 편집팀 사무실에 계심). 팀장님도 대표님도 대리님도 사람이 참 좋았다. 자상하고 부드러운 분들이셨다. 솔직히 나는 이 회사에 뼈를 묻으리라 생각했다. 애석하고도 우둔하게도.



다음날 나는 마케팅팀 사무실로 불려 갔다. 주임님은 물었다.

"이거 디자인한 거 맞아요?"

그녀의 말투는 늘 어딘가 '내가 너보다 선배'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날카로운 그녀의 말에 찔리고 싶지 않아서 조목조목 대답했지만 내가 디자인을 너무 못해서 이거 그냥 외주 맡겨야 될 것 같다고 이사님이랑 다 상의 봤다고 한다. 


'시간도 3시간밖에 안 줬으면서 대체 왜?'

의문이 들었다. 그럼 어제 3시간 동안 한 작업은 물거품이 되는 건데, 왜 시간을 이런 식으로 쓰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텐데.

또, 정말 내가 디자인을 못했다고 생각하기엔 시간을 적게 주었고, 해달라는 디자인 그 모양대로 만들었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이 회사에서 편집팀에 들어가고자 전에 일하던 출판사에서 디자인을 했던 사실을 숨기고 사무직으로 일했었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때 편집디자이너였다. 작은 출판사였기에 웬만한 일은 다 했지만, 그래도 디자인이란 디자인은 다 도맡아 했었기에 상세페이지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줄은 알았다. 알아서 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궁금증은 그녀의 다음 말에서 해결이 되었다.


"어제 이사님이 왜 자기한테는 인사를 안 하고 갔냐고. 인사를 꼭 하고 가라고 말하셨어요. 오늘부터는 꼭 마케팅팀에 들러서 인사하고 가세요."


그러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내 디자인을 훑어보고는 미소 짓고 갔던 이사가 자기한테 인사를 안 하고 갔다고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거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리에 든 생각은 좀 달랐다. 촉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사님이 대표님 부인인가?'


물론 인사야 하면 좋지만, 이런 결을 가진 사람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다. 명예, 돈, 학벌 등 어떤 힘을 사용해서 상대를 강요하는 사람은 보통 경험 없이 위치에 오른 사람이 대부분이다. 셋째 날에 야근을 하면서 나의 촉은 사실로 드러났다. 두 분이 부부 사이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으셨다. 대체 숨길 일도 아닌데 숨긴 걸 보면 그동안 갑질을 어마어마하게 해왔다는 소리와 같았다. 


순간, 이 회사에 잘 온 걸까, 너무 찾아보는 시간도 갖지 않고 고른 회사가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나는 팀장님을 믿었다. 팀장님과 같은 선배를 만나는 일도 하나의 인복일 테니, 나는 팀장님과 다른 좋은 직원분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안심시켜주었던 거다.


그런데 너무 일찍 '팀장님'이란 방파제 없이 '이사님'이라는 직격탄을 맞아버렸다. 


때는 저번 주, 팀장님께서 이사 준비를 해야 해서 월차를 쓰신 금요일이었다. 

이사는 점심시간 30분 전에 나를 불렀다. 거의 20분가량 전달 사항을 들었는데 한마디로 '책 소개 써오세요'였다. 그 한마디를 20분으로 늘리는 마법을 부리신 거다. 12시 30분이 점심시간이라 옷을 입고 밥 먹고 왔다. 근데 이사는 방금 자신이 일을 시켰는데, 내가 밥을 먹는 사실이 싫었던 거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대표님이 인턴 둘에게 밥을 사주시겠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선 마케팅 팀에 있는 입사동기를 불러야 했다. 밥을 먹고 오겠다고 하니 순간 모니터 뒤에서 마우스를 딸깍이는 이사에게서 '빠직'하는 소리가 귓전까지 울렸다. 


그녀는 자신이 일을 시켰는데 밥을 먹으러 간다는 게 아니꼬왔던 거다. 밥을 먹고 오니까 책 소개를 20분 안에 써서 바로 보내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5일 차 신입이어서 책을 다 못 읽었다. 시간이 부족하니 시간을 더 달라고 하자, 이거 지금 빨리 서점에 보내야 한다며 어쩔 수 없다는 소리를 해댔다. 


어쩔 수 없이 죽기 살기로 글을 썼다. 이런 상황은 이 회사에서의 5일 동안 자주 있었던 일이었다. 불가능한 미션 던지기. 그때마다 팀장님이 중간 방파제 역할을 해주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팀장님이 없었다. 글을 써서 보내자 이사가 물었다.


"대체 이건 무슨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쓴 거죠?"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정말 모다 씨는 편집자로서 아직 멀었고 갈길도 정말 태산이네요." 

"글을 못 써도, 너무 못 쓰네요. 배울 것도 많은데 지금 여기가 학원인 줄 아세요?"


혐오스러운 발언이 네이트 온 메신저 창에 이어졌고, 내 자리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이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이거! 이 부분! 맞는 말이에요? 대체 책에 있는 내용이 맞아요? 다시 확인해봐요!"


알고 보니 최종 파일인 줄 알고 건네받은 어제 파일 뒤로 새로운 최종 파일이 생겼는데, 그걸 모른 채로 책 소개를 쓴 거였다. 이사는 당신이 지금 회사를 두고 사기를 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너 때문에 회사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외쳤다. 내가 '그럼 다시 고쳐서 보내드릴까요' 묻자 그녀는 전화기가 부서질 정도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솔직히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계속 이를 갈고 왔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선을 아주 많이 넘어버렸다. 가슴이 뛰고 얼굴이 벌게졌다. 아무리 이 회사 저 회사 다니면서 다양한 미친놈을 만나봤다지만, 이렇게 질 떨어지는 인간은 정말 처음이었다. 이게 회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인터넷에 아이디를 치고 들어가 국민 취업 담당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심장이 뛰고 온 몸이 화끈거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메일의 줄 바꿈도 중구난방이었다. 요는 이 회사를 그만두면 어떻게 되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정신을 차리며 맡은 바를 다했다. 금요일 밤에 얼마나 심장이 뛰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주말 내내 머리가 지끈거리고, 자꾸만 화가 났다. 대체 이게 현실인지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이번 주 월요일, 나는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퇴사를 해버렸다. 다행히 국민 취업도 일 경험 센터도 내 편이었다. 물론 이번 달 국민 취업지원금은 나오지 않지만, 여기를 더 다녀서 심리상담 비용을 더 낼 바에 정신건강을 챙기는 편이 훨씬 나았다.


퇴사하면서 나는 이사에게 장문의 글을 보냈다. 속으로는 욕이란 욕은 다 나왔지만, 훗날 이때를 돌이키며 선 넘는 말을 내뱉은 나 자신에게 후회하기 싫어서 얼마나 분노를 조절해가며 썼는 줄 모르겠다. 


"이사님.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이사님의 말들이 너무 상처가 되었고, 도무지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저도 속상한 부분 털어버리고 이사님도 실은 몰랐을지 모르는 부분 아실 수 있기를 바라며 이렇게 메시지를 남깁니다.


  이 회사 저 회사 다니면서 다양한 분들을 만났지만, 그 어떤 회사에서도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들은 회사를 대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칠 부분이 있으면 상세하게 알려주고 지도받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사님과 업무를 할 때 대화를 하다 보면 저에게 발전할 방향을 제시하시기보다는 그냥 화풀이 대상으로만 보시는 것 같은데, 화를 내지 않아도 함께 협업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면 다그치는 일에 중점을 두지 마시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신다면 분명 좋은 직원이 회사에 왔을 때 더 큰 도움을 받으시리라 믿습니다. 그게 1000% 더 업무 효율성이 높을 겁니다.


  그리고 비록 제가 다른 출판사 이력이 있다고는 해도, 편집일은 처음 하는 신입 초짜입니다. 당연히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지 않을까요? 학원이 아니라는 말씀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알려주지도 않고 '알아서 다 배우고 일주일 안되었지만 기존 편집자처럼 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럼 저를 왜 쓰신 거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 기회를 주시고 너른 이해심을 가지면 저희가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회사에 함께 보탬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끝으로 이사님께서 이게 말이 되냐던 팀장님 책 소개 저는 좋았습니다. 팀장님도 바로 쓰고 보내셨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습니다. 만약 조금 더 고쳐서 올렸더라도, 20대와 30대 초반의 경제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친구들이라면 분명 팀장님께서 쓰셨던 책 소개를 좋아했을 겁니다. 이사님 자신의 기준에 어긋났다고 틀린 게 아닙니다. 그냥 이사님이 이사님 기준에서 안 맞으니까 바꾸라는 건 사실 객관도가 극히 낮습니다. 

  이사님이 알고도 그러신 게 아니라 모르셔서 그러셨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주관적이신 이사님의 ‘선택’도 ‘틀린’ 선택이 꽤 많다는 걸 아시고 고치시면 지금도 실력이 있으시지만 아랫사람을 포용하는 분이 되어 사랑받게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회사에 일을 하러 갔지 이사님 마음에 들려고 간 게 아닙니다. 그 둘을 분간하지 않으시면 이 시대에 ‘갑질’이라는 소리 들으십니다. 그 두 가지를 좀 분간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다양한 방면으로 많이 배워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사가 과연 이해했을까 싶지만, 보내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속이 후련해서 춤을 춰댔다. 내 말을 이해하고 고치면 좋겠지만, 아마 고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 회사를 뉴스에서 보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나는 내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생각했었다. 나는 내 아이를 대통령이 와서 아니라고 해도 맞는 일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건 내 아이에게서 원하는 부분이기보다는 내가 내 삶에서 원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살면서 소신을 숱하게 굽혀와서 내 아이만큼은 그러지 않길 바랬던 건데, 그거 그냥 이제부터 내가 하면 되는 거였다.


나는 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도 이사와 더 부딪쳤던 거겠지만, 아닌 회사는 빠르게 떨어져 나가는 편이 사실은 더 좋았고, 나는 나의 소신을 지킨 이 5일간의 경험으로 한 층 더 성장했다. 


그래도 웃기다. 5일 다니고 퇴사하긴 정말 처음이다.


다시 박차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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