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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Feb 10. 2024

어린 왕자 (2)

함께 있어줄 게 아니라면 반드시 떠나겠다는 기약이라도 쥐어줄래.


- 거기서 뭐 해.


비슷한 시간에 종례를 마쳤을 텐데, 너는 언제 학교를 그리도 빠르게 빠져나갔는지. 하굣길에 반드시 지나치게 되는 아파트 단지 뒤쪽 빈 공터의 정자, 거기서 너를 발견했다. 어려서부터 자주 들르곤 했던 놀이터를 철거하고 덩그러니 남은 널찍한 공터였다. 머지않아 놀이터보다 더 실용적인 구조물이 세워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높다랗고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고층 아파트 단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인 데다, 그런 것치고 길가를 다니다 보면 눈에 잘도 띄는 곳이었으므로.


곧 사라질 장소라는 걸 아는 듯 다양한 이들이 머물다 갔다. 단지 내 놀이터를 벗어나 모험을 하고픈 어린아이들, 자의로든 타의로든 주인을 잃은 강아지나 고양이들, 천을 덧대고 덧대어 모양이 뒤틀린 바지를 입고 구부정히 앉아있는 노인들. 그들은 아이와 어른, 동물 등의 종류로 분류되어 산 적 없는 것처럼 정자에 모여 앉아 있곤 했다.


모두가 보금자리로 돌아간 시간, 거기 네가 서 있었다. 신발까지 벗고는, 정자의 끄트머리를 딛고 우뚝 서 있었다. 이 시간 때쯤의 노을은 날마다 빛깔이 달랐다. 다 꺼져가는 불씨가 발악하듯 타닥거리는 주홍빛, 옷자락에 물든 복숭아 단물처럼 엷은 분홍빛, 얕은 물가의 묽은 바다 빛, 축축한 곰팡내가 날 것 같은 보랏빛


너의 가지런한 맨발 옆에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걸터앉았다. 오늘의 노을은 암 환자의 입술처럼 푸르죽죽한 잿빛이었다. 저런 노을도 다 있네. 흐르지 않는 노을 위로 두드러진 몇 개의 구름 조각을 올려다보았다. 시간과 함께 응고된 듯, 무엇 하나 움직이는 법이 없다. 너도, 노을도, 구름도.


- 겨울을 기다리고 있어.


꿈꾸는 듯 몽롱한 목소리가 그 돌 같은 구름들을 건드린다. 네가 줄이 끊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 황급히 너를 바라보았다. 아직 남아있는 햇빛에 네 얼굴은 조금 투명해져 있었다. 너, 겨울같이 차가운 것도 좋아하는 아이였니. 뒷배경이 투명히 비치는 얼굴이 나를 내려다본다. 여기서는 네 입꼬리 끄트머리의 미세한 움직임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네 작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작은 단어 하나라도 놓칠까 염려스러웠다. 당장 발목이라도 붙들 수 있을 만큼, 이렇게나 가까이 있음에도 그랬다.


- 아니, 난 여름이 좋아.


- 그런데 왜?


- 또 여름이 오려면 겨울을 기다려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아직 무더위가 잔재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어느덧 절기상 여름은 한참 뒤처지고 있었다.


- 이제 곧 여름을 떠내 보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보단, 겨울이라도 기다리는 게 좀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너는 어때, 뒤이어 건네진 물음에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네 눈을 피하여 턱을 붙잡아 내렸다. 나는 둘 다 싫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그런 극단적인 계절들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럼 봄가을은, 네가 물었고, 나는 그것도 글쎄… 말끝을 흐리다 이내 멀뚱해졌다. 변변찮은 대답밖에 내놓을 수 없음이 계면쩍어 다시 바라다본 하늘에는 금세 구름의 모양새가 바뀌어 있었다. 머리 위에서 한껏 흐트러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네 맘에 드는 계절이 어디 없을까? 뭔가 더 있을 것 같지 않아? 계절이 네 개가 전부라니. 노을도 저렇게 색이 많은걸.


너는 깃발 같은 머리카락을 한 무더기 휘날리며, 웃음 때문인지 잔뜩 달뜬 말들을 던졌다. 하늘 저편의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 대화 내용의 중심은 정작 나를 향해 있어 어쩐지 기묘했다. 거기 정말 뭔가 있기라도 한 거야?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는 나뉘지 않는 또 다른 세계라도 있는 거야? 넌 정말 겨울, 아니 그 이후의 여름을 기다리고 있는 게 맞아? 좀처럼 그치지 않는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떠오르는 물음들을 잽싸게 낚아채 갔다.


- 정말 그런 것처럼 말하네.


그렇게 대꾸하자 그제야 너의 웃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더니 편안한 한숨을 길게 내쉰다. 네 몸속에서 희부연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몸이 실로 가벼워지는지, 네가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고, 자연스레 어깨가 균형을 잡기 위해 좌우로 흔들리며, 네 양팔이 옆으로 나란히 펼쳐졌다. 너는 이제 막 항해 준비를 마친 돛대 같았다.


착각은 네가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는 것으로 더욱 커져, 나는 공중에서 달랑이는 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너의 발뒤꿈치가 크게 반동하며 다시 내리 앉았다. 무릎을 살짝 굽히며 네가 나를 바라본다. 해가 조금 더 하강하여, 놀라 크게 뜬 눈망울이 이제는 선연히 보였다.


- 가지 마.


갑자기 목소리가 잠겨 마른 입술만 달싹이었지만 너는 내가 뱉은 말을 읽었다.


- 어딜?


- 어디든, 어디로든 돌아가지 마.


상상뿐이었는데,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쥐어짜 내야만 했을까. 너는 눈을 와락 구기며,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네가 그렇게 깔깔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공터 바깥 길목을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그 소리에 놀라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아마 높이 서 있는 너밖에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토록 웃을 거리가 네 주변에는 도무지 없음을 살펴 잠시 이상하게 여기다 다시 가던 길로 걸음 할 것이었다.


- 네가 애니?  


한참을 웃던 너는 짓궂은 핀잔을 주면서 다시 조금 차분해졌. 그러나 한결 네가 무거워진 것 같아, 그래서 어디로든 가버리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너보다는 조금 더 기뻤다. 그만 집에 가자,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내가 네 손에 붙들렸다. 바람이 갑자기 뒤에서 훅 불었고, 너는 앞으로 넘어온 네 머리카락에 얼굴이 통째로 다 잡아먹혔다. 나는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서도 한참 위에 있는 너를 다시금 올려다봐야 했다. 너는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고집부리려 작정한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앙다문다.


- 만약에, 정말 그다음 세계가 있으면, 내가 어디로든 돌아가게 되면, 넌 어떡할래?


호흡이 또 턱, 걸리운다. 네가 앞으로 기울어져 다칠까 한 걸음 다가서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지는 않아, 하지만 너에게는 반드시 돌아갈 곳을 봐둔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너는 끊임없이 순리에 어긋나는 아이였으므로. 너에 대해서라면, 말이 되지 않을 건 없었다. 하지만 글쎄, 내가 너를 놓아줄 수 있을까. 정체 모를 계절이 너를 앗아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추후에 또 만나기를 얌전히 기다릴 수 있느냐고?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북한 머리카락에 뒤덮인 네가 너 같지 않아 낯설게 느껴지는 도중에 바람이 다시 반대쪽에서 불어왔다. 흐린 음색밖에 남지 않은 네 혼잣말들이 바람에 가득 묻어왔다.


- 어린 왕자 말이야, 정말 자기 별로 돌아갔을까? 죽어서, 아니면 살아서? 정말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그래서 다시는 거기서 떠나지 않았을까?


또 어린 왕자 이야기.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를, 아직 끝나지 않은 순간을 궁금해하듯 너는 말하고, 반대쪽 손을 들어 그리움을 지우듯 허공에 선을 죽 그었다. 하얀 뺨 위로 흠집 난 그리움이 한 방울 툭 떨어져 빛난다. 그 눈물 같은 것이 한껏 고집스러웠던 입술을 마침내 적셨다.


- 그래도 그렇게 믿고 기다려줘.


-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면.


이건 너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너의 말을 이을 뿐이다. 그러나 너는 공교롭게도 거기서 대화를 그치고 정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굳이 흙바닥을 디뎌 발을 더럽힌 후에, 다시 흙을 털어내고 신발을 신었다.


- 그만 가자.


- 어디로?


- 어디긴, 집으로.


네가 내 손을 꼭 잡고 이끈다. 정말, 집으로? 그래, 여기 우리의 집이 있다. 여기 이 세상에, 너와 나의 집이. 당연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까지 우습게도 시간이 걸렸다. 너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어떻게든 너를 절절히 기다릴 일이 없을 것이다. 너는 떠났다가도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고, 나는 네가 사라질까 그토록 무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뒤숭숭한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세상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처럼 노을의 색이 층마다 자꾸만 바뀌었다. 마음이 한 편씩 도려내지는 것처럼 서늘하게 아렸다. 너는 내 손을 실수로 놓치지도 않고 매일 집에 가는 그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방금 나눈 이야기들이, 있던 곳이 다 뭔가 싶어 몇 번이고 나 혼자 뒤를 돌아보았다.


제발, 함께 있어줄 게 아니라면
반드시 떠나겠다는 기약이라도 쥐어줄래
네 살아온 행적에 대해 그리도 침묵할 거라면
그래, 너는 내 마음 안에 사는 것들을
끝내 들여다볼 수 없겠지
- 이닻,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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