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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un 20. 2024

우직한 로봇청소기

 몇 해 전 결혼기념일 남편을 졸라 로봇청소기를 장만했습니다. 기념일을 축하하며 꽃을 사거나 케이크를 자르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고가의 선물을 주고 받는 대신 로봇청소기 하나만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랜 시간 신중하게 고르고 골랐습니다. 무엇보다 가성비를 가장 따지는 편인지라 고가의 제품 대신 30만원 안팎에 물걸레 청소까지 되는 중소기업 물건으로 골랐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택배상자를 열고 처음 작동시키던 날. 손이 닿지 않던 침대 아래까지 들어가 쌓여있던 먼지를 잔뜩 쓸어내고 물걸레질까지 하고 나오는 로봇청소기가 그렇게 대견해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잠시 청소를 맡겨두고 커피를 한 잔 마시려고 하는데 이 녀석이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자마자 고장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베란다 창틀을 넘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더라고요.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는데 말이죠. 설명서에 나와있는대로 블루투스를 켜고 어플에서 청소기를 인식시킨 후 청소금지구역을 설정하는데 한참이 걸렸습니다. 매트 위에서 현관문 앞에서 가구 앞에서 우드득 소리를 내며 멈출 때마다 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아직 개발 초기라서 그랬을까요?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은 로봇청소기에 실망한 적도 있었지만 저는 왜 그런지 조금은 모자란 이 녀석한테 정이 갔습니다. 요령 피울 줄 모르고 융통성 없이 한 번 하겠다고 결심한 일은 있는 힘껏 돌진하고 힘에 부쳐 우드득 소리를 내다가도 정작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때는 수줍게 '장애물을 치우고 청소를 계속해주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 꼭 저를 닮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제 시간을 보내다가도 로봇청소기가 도움을 요청하면 바로 달려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했어요.


 "아이고~ 녀석아. 여기 아니라니까 또 와 있네. 요령없이 성실하기만 한 녀석. 너를 어쩌면 좋니?"


 요즘 새로나온 로봇청소기는 알아서 먼지통을 비우고 걸레까지 빨아주고 살균까지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광고가 좀 과장되었다 치더라도 분명 우리 집에 있는 저 녀석 보다는 업그레이드 되었을 겁니다. 인터넷에 후기들을 검색해보고 가끔 홈쇼핑 채널에서 광고를 할 때면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요즘들어 로봇청소기가 가끔 말썽을 부리거든요. 그런데 왜 인지 선뜻 새것으로 사야겠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아직은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이 녀석과 함께 살아보겠습니다. 조금 모자라도 우직하고 성실한 저를 닮은 이 녀석이 번아웃되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요. 


 '조금은 모자란 나의 로봇청소기야, 조금 더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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