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처럼 보여도 다시 길이 열립니다
그 순간은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잘라야 하는 자리, 잘릴 수밖에 없는 자리.
그때야 비로소 드러나는 게 있다.
“차갑고 잔인한 순간을 운명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자리.”
MBC 라디오 <여성시대〉의 박금선 작가는 방송 PD의 일을 그렇게 말했다.
PD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 욕심에 늘 새로운 사람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기존 작가나 출연자, 스태프를 교체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봄·가을 개편 때마다 수많은 방송인들이 일자리를 잃는다. 대부분 프리랜서라서 다른 자리를 찾지 못하면 곧장 실업자가 된다. 진행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방송을 사랑하는 마음에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PD가 책임지기에 프로그램이 기울면 누군가 내보내며 활로를 찾게 된다. 그 순간, PD는 잔인한 칼날을 쥔 자리에 서게 된다.
나도 그런 순간을 겪었다. 새로 맡은 프로그램이 재미없고 늘어지고 청취율도 떨어져, 더 유능한 작가로 바꾸려 했다. 전임 PD는 그 작가가 새 PD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겠으니, 계속 쓰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하지만 새로운 작가가 숱한 인기 프로그램을 성공시킨 뛰어난 작가였기에 흔들릴 수 없었다. 몇 달 뒤, 잘린 작가가 앓던 암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들었다. 그제야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잘리는 사람도 괴롭지만, 자르는 사람의 마음도 힘들다. 그러나 어떤 이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황인용의 FM 모닝쇼〉 PD 할 때였다. 개편으로 새로운 작가를 뽑으려고 여러 사람을 면접했다. 한 작가가 감각은 좋았지만 메시지가 약해 보여서, “저희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고 돌려보냈다. 작가는 낙심했을 텐데, 오히려 나를 먼저 위로했다. “저를 불러주신 것만도 고맙습니다. 좋은 작가 찾으시길 바랍니다.” 당황한 쪽은 나였다. 그 넉넉한 태도가 오래 기억에 남았고, 다른 기회에 그 작가와 함께 일했다.
정치판에서도 같은 장면을 보았다. 노태우 정권 시절, 정원식 전 서울대 교수가 국무총리에 임명됐다가 김영삼 대통령후보의 요구로 물러나야 했다. 그가 총리직에서 사퇴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저에게 한 일에 부담 갖지 마시라. 충분히 이해한다.”
<격동 50년>이라는 라디오 정치 다큐멘터리 드라마 PD로, 정원식 전 총리를 인터뷰할 때 들었던 이야기다. 그래서였을까. 이후 김영삼대통령은 그를 선대위원장과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으로 불렀다. 끝이라고 여겼던 순간, 다시 길이 열렸다.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진행자 교체를 알리는 시점은 늘 어렵다. 미리 알리면 방송을 망칠 수 있고, 막판에 알리면 돌발행동을 하기도 한다. 어떤 분은 교체 통보를 받자, 생방송 직전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제작진이 대타를 구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좁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
〈별이 빛나는 밤에〉 PD 시절, ‘별밤극장’ 코너 출연자를 교체해야 했다. 새 출연자를 섭외한 뒤 기존 출연자에게 어렵게 전했더니, 그녀는 뜻밖에 환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늘 별밤 팬이에요.” 그 한마디가 나를 그녀의 팬이 되게 했다. 1990년대 MBC TV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미선이 할머니’ 역으로 활약했던 개그우먼 정재윤 씨였다.
잘라야 하는 자리, 잘리는 자리는 누구에게나 온다.
차갑고 잔인한 순간일지라도, 태도에 따라 품격은 드러난다.
때로는, 잘리고도 다시 피어나는 길이 열린다.
* 이 글은 '참 소중한 당신' 2018년 5월호에 필자가 기고한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12화, 받아들이기>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