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또 하나의 거울
얼굴은 거울에 비친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어디에 비춰볼 수 있을까.
대학 시절, 한 친구가 나를 '디오게네스'라는 고상한 별명을 붙여주었다. 디오게네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디오게네스 앞에 서서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소원을 물었다. 디오게네스는 "햇살 가리지 말고 비켜서 달라"라고 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친구가 그리 별명을 붙인 뜻을 짐작했다. 철학을 좋아하던 그 친구 눈에는 외모에 무심한 내가 디오게네스를 닮아 보였나 보다.
"너, 그렇게 하고 다니면, 여자친구 생기겠냐?"
대학 신입생 때, 유난히 날 챙겨주던 학생과 유 선생님이 내게 해준 말이다. 피식 웃고 넘겼다. 그때, 나는 거울을 거의 보지 않았다. 외모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아서다. 머리를 빗지 않고 다니다 보니"까치집 지었네"란 말을 자주 들었다. 그 말이 흉이라는 것도 모르고, 농담으로만 여겼다.
그 당시 나는 내 외모뿐 아니라 남의 외모까지 관심이 없었다. 외모에 신경 쓰는 사람을 오히려 눈 아래로 보기도 했다. 외모보다 추구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시절이었다.
1980년대, 중국 베이징으로 단체 관광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당시 베이징은 소달구지가 다닐 정도로 초라했다. 길거리를 오가는 중국인 남자들 대부분은 푸르죽죽한 인민복 차림이었고, 머리는 '까치집' 하고들 있었다. 혀를 내둘렀다. 왜 저렇게 지저분하게 사는지 한심하게 여겼다. 그 순간 대학 신입생 시절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인민복만 입었으면, 나도 저 모양이었을 거다. 남을 통해 비로소 내 모습이 보였다.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해했을까. 내가 외면했던 거울을, 남이 대신 들어 보여준 셈이었다.
요즘 나는 거울을 자주 본다. 갈수록 얼굴이 어둡게 보여 나조차 거리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만큼이나마 이런 표정 짓고 사는 것도 다 거울 덕이다.
딸아이가 마흔을 넘긴 뒤부터는 나를 놀라게 하곤 한다. 누군가가 어려운 문제를 피하려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문제를 똑바로 보세요, 고개 돌리지 말고."
내가 우물쭈물하면 세차게 몰아붙인다.
"아빠, 아빠가 말했던 거처럼 정면돌파 하세요. 피하지 말고."
내가 싫어하는 문제, 골치 아픈 문제를 외면하면 마주하라고 다그친다. 다 내가 한때 딸에게 해주었던 말들 아닌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몇몇 일은 뜻대로 이루기도 했다. 딸아이 역시 원하는 것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왜 그리 거칠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딸뿐만이 아니다. 세월 가면서 가족들이나 함께 일했던 분들에게서도 내 말투, 내 행동의 흔적을 본다. 타인을 통해 비친 내 모습에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옆도 보며 즐기며 살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고개도 돌리고 한숨 쉬어가며 지냈을 수도 있었다. 그때는 너무 숨 가쁘게만 살았다.
내 행동에 대한 평가의 시작은 나를 들여다 봄이다. 내가 가는 길이 바른 지 그른지는 나를 정확히 봐야 안다. 외모는 거울로 확인할 수 있지만, 행동은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이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세월이 갈수록 내 가족의 삶 속에서 내 모습이나 내 생각이 언뜻언뜻 비친다.
내 말투와 습관이 가족에게서 되돌아올 때, 나는 웃으면서도 뜨끔한다.
세월은 또 하나의 거울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고스란히 비춰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