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첫날을 기다리며

2022. 1. 9.

by 그런썸

'첫'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특별한 느낌을 준다. 첫눈, 첫 발자국, 첫인사, 첫 만남, 첫사랑, 첫 무대... 오로지 단 한 번뿐이어서 설레고 때로는 서툴기도 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아이들을 처음 만나는 첫날, 나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첫째는 '선생님, 또는 학생이란 모름지기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문장을 색깔이 다른 포스트잇에 쓰게 한다. 하나는 '선생님은...'을 쓰고 다른 하나는 '학생은...'을 쓴 후 같은 색깔끼리 칠판에 붙인다. 아이들이 붙인 '학생은 이러해야 한다'는 문장을 읽는다. 여기 모두 해당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누구도 쉽게 손들지 못한다. 첫날부터 서먹함을 뚫고 그런 베짱이 있는 아이는 아직 못 보았다. 그럼 자연스럽게 나는, 사람 좋은 (사악한) 웃음을 띄면서 사실은 나도 선생님이 갖추어야 할 모든 미덕을 다 가지지 못했다고 커밍아웃한다. 첫 만남의 출발선은 우리가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배운 것을 나누며 서로 돕는 이유가 된다. 나는 그제야 내 소개를 한다.


둘째는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을 아이들에게 묻는 것이다.

내 생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내 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내 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글쓰기를 잠깐 시켜 보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중요한 사람은 '가족'이라고 적은 아이가 가장 많고 조금 더 깊게 생각한 아이는 '자신'이라는 답까지 찾는다. 중요한 일에 대한 답은 '꿈을 이루는 것'이 가장 많이 나온다. 처음 만나는 날 안 그래도 낯설고 어려운데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를 거들먹거리는 선생님 말에 아이들은 온 신경을 기울여 집중한다.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일 년 동안 학급 분위기를 이끌 '중심 생각'이 된다.

바로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친절(선)을 베푸는 것.


이것은 아이들을 대하는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나 사용 설명서'를 쓰는 것이다. 아이들 사진을 미리 받은 후 인쇄해 두었다가 같이 붙이라고 하면 얼굴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나의 장점과 단점, 자신 있어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잘 못 해서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것, 나는 이런 것을 싫어하고 저런 것을 좋아하고, 나를 다룰 때는 이런 점을 조심해 주었으면 좋겠다 등등 학급에서 잘 지내기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쓰게 한다. 아이들의 자기 설명서는 꽤 오랫동안 게시판에 붙여지고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번에 졸업한 아이들한테 '선생님 사용 설명서'를 부탁했었다. 졸업하는 날 선물처럼 놓고 간 내 설명서에는 일 년 동안 아이들이 관찰한 내 성격, 내 습관, 내가 무엇에 진심이고 어떤 행동을 싫어하는지, 이럴 땐 어떻게 하라는 충고까지... 나를 겪어 본 선배로서 후배들이 학교생활을 잘하길 바라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내 백 마디 말보다 훨씬 잘 먹힐 것 같아 든든한 자료이다.


100일 글쓰기 수업 첫날 강사님이 소개해 주신 그림책 ‘프레드릭'을 떠올린다. 힘껏 도약하기 위해 잔뜩 움츠리며 충전하고 있는 지금, 프레드릭처럼 좋은 문장, 좋은 생각, 좋은 기억을 가득 채워 그 힘으로 올해 새롭게 만날 아이들과도 잘 지낼 수 있길 기원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 쓸모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줄도 모르고 지나갈 날들보다 산다는 건 이런 거지,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에 빛을 발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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