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친구 지금 난 너무나 절망스럽다네. 내가 빌하를 범한 일이 온 가족에게 알려졌다네. 온 가족에게!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바람 소리가 아니었던 걸세. 집안의 하인 중 하나가 그 일을 목격했고 내 아버지 야곱에게 전했을 뿐 아니라,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떠들고 다녔지. 쳐 죽일 놈!
어제저녁 처소에서 쉬고 있는데 단과 납달리가 내 장막으로 찾아왔네. 아니, 정확히는 쳐들어왔지. 분기탱천한 얼굴로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더군.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한 대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네. 정신을 차려보니 아버지 야곱을 가운데 두고 단과 납달리가 딱 아까 그 얼굴로 서 있었네. 주변을 살펴보니 빌하가 서럽게 울고 있었고, 그 옆에는 나의 어머니 레아가 처참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네. 아... 불쌍한 내 어머니...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 일이 사실이냐고 물었지. 증인이 있으니 사실대로 고하라고 말이야.
거짓을 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했네. 고개를 숙이고 맞다고 대답하자, 단과 납달리는 어서 저 놈을 쳐 죽여야 한다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지. 아... 나는 잊었던 걸세. 빌하는 아버지의 여인이기도 했지만 내 형제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단 사실을. 고함을 지르던 단은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몽둥이로 내 머리를 후려쳤네. 얼굴을 따라 흐르는 뜨거운 피의 비릿한 향을 느끼며 쓰러질 때 다른 형제들의 얼굴이 보였네. 아무도 말릴 생각이 없었지. 모두들 단의 행동이 합당하다고 여기는 듯했지. 내 어머니조차도 울고만 있을 뿐 말리지 않았네. 의식이 흐릿해질 때 눈앞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아버지 야곱의 얼굴이었네.
눈을 떴을 때는 내 장막 안이었네. 어머니 레아가 나를 보살피고 있었지. 어머니는 연신 다행이라며 내 상처부위들에 약을 바르고 있었어. 그리고 어머니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었지.
단과 납달리가 몽둥이를 들고 나를 죽이겠다고 난리 칠 때, 아버지 야곱이 나를 감싸며 막아섰다고 하더군. 분노한 형제를 말릴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지. 단과 납달리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아버지에게 몽둥이를 휘두를 순 없는 법이니까. 그는 빌하의 형제들을 막아서며 이 집안의 가장된 권위로 이 일을 덮기로 결정했다고 말씀하셨다더군. 단과 납달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들자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르우벤을 죽이고 나면 그다음은 네 어머니 빌하의 차례다. 빌하는 어쩔 셈이니? 빌하는 우리 가족에게서 내쫓기거나 갇혀서, 나의 아내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니? 그래서 이 일을 덮겠다는 거다. 네 어머니 빌하는 비록 나는 다시 찾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서 또 너희들의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을 거다. 평생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히 공급하고 또 이 집안의 모든 형제는 빌하를 어머니로서 대우할 것이다. 르우벤도 물론이고!
르우벤은... 여전히 내 아들로 너희들의 형제로서 함께 할 것이지만 그의 장자로서의 자격은 박탈하겠다. 어리석은 잘못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니까. 그러니 너희들도 이만 이 일을 덮자꾸나.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토록 험악한 세월을 주시는지 모르겠구나... 라헬이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늙은 아비에게 자비를 베풀어 다오. 아내도 자식도 나는 누구도 더 잃을 수가 없구나. 이 모든 것은 다 내 잘못이다... "
자신을 덮는 삶의 무게에 고통하는 아버지를 그들은 무시할 수 없었을 걸세.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 빌하를 위해 이 편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던 단과 납달리는 결국 몽둥이를 내던지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갔다더군. 어머니 레아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이만하게 끝나길 다행이라고 하셨어.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해선 안된다고. 네가 지금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을 남기시곤 장막을 나가셨네.
깊은 밤 혼자 가만히 앉아 요 며칠 내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네. 욱신거리는 온몸의 상처들 만큼이나 마음도 쓰리고 아팠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네. 나는 대체 왜 빌하의 장막에 기어 들어간 것일까. 아니 그랬다고 하더라도, 빌하가 화를 낼 때 왜 빨리 돌아 나오지 못했는가. 만일 그랬다면 빌하도 그 일을 덮어주지 않았을까? 빌하는 라헬이 아닌데, 왜 라헬에게 난 분을 거기에다 풀었단 말인가. 이제 와서 라헬에 대한 분풀이를 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기에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인지 너무나 후회가 되었네. 요셉의 등장으로 안 그래도 불안정하던 장자의 자격을 결국 완전히 박탈당하고 말았지 않았나.
그런데 말일세. 그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이 따뜻했다면 자네는 내가 미친놈 같겠지? 나를 감싸는 아버지의 모습을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 본 것 같네. 아버지는 기꺼이 나를 위해 단과 납달리의 몽둥이 사이에 끼어들었네. 자신의 아내를 범한 이 패역무도한 큰아들을 위해. 그러니까 아버지는 요셉이 태어났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거야. 내가 라헬의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첫 자식인 나를 사랑하는 거였어.
얻어맞은 몸뚱이가 여기저기 아프고 장자의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내일 아침 다시 마주하게 될 형제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네.
열심히 살다 보면 아버지가 마음을 돌려 그 자격도 원복해 주실지 몰라. 난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