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을 불태워 내 시간의 숭고함을 묻다 (TO MY FATHER)
"그래서 '디스커버리 힐'로 갈 거라고요?"
"추천할 다른 일몰 포인트가 있는 건가요?"
숙소 매니저가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대기 중이던 뚝뚝 기사아저씨께 뭐라 한 마디 하길래, 잘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일몰 포인트를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도착한 곳은 나도 알고, 연짱이도 알고, 모두가 아는 '디스커버리 힐'이었다. 그냥 멋진 척 한 번 해 본 거지, 매니저 오빠?
구불거리는 길 위에 놓인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 끝에 도착한 '디스커버리 힐'은 한적한 바람이 부는 기분 좋은 곳이었다. 번잡한 하루의 흔적을 지우고 그 날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하나, 둘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운데 라타나폰(RATANA PON) 사원이 보인다. 그 뒤 양 옆으로는 투칸테인(HTUK KANT THEIN) 사원과 레맷나(LAY MYE THNA) 사원. 불탑과 사원의 도시 바간의 어떤 사원보다, 세월과 함께 스러지는 인떼인의 숱한 불탑보다 므락우 사원들이 나는 훨씬 좋았다. 동네 뒤로 야트막한 산능선 아스라한 것조차 포옥, 한숨이 나오도록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이 므락우가 좋았다.
"엄마, 하늘이 빨개지고 있어."
"그러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이 하셨어요. 햇님, 안녕."
"어, 나도 인사할래. 햇님, 안녕. 고마워요."
므락우 작은 동네 위로 모두의 하루를 기억하는 붉은 해가 지고 있다.
일몰은 매일 새로 태어나는 해의 한살이의 마지막 순간이다. 어둠을 가르고 오늘 처음 붉게 태어난 해는 품고 있던 빛과 열을 세상 구석구석 골고루 쬐어주고, 태어났던 어둠 속으로 다시 침잠하여 하루의 삶을 마감한다. 그 한살이를 마치기 직전, 해는 마지막 남은 기운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훑어 모아, 어둡고 흐릿하게 흩어지려는 세상 모든 것들의 윤곽을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비춰주고 장엄하게 사라진다. 하루를 마치는 마지막 순간, 가장 뜨겁고 환하게 불타오르다 사위는 것이다. 그것은 열심히 인생을 살아낸 끝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 내 아버지의 마지막 노년과 같다.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마지막 한 줌 남은 생의 에너지마저 남김 없이 연소하여 남은 자식의 앞 길을 틔워주고 가려는 그의 마지막 의지의 시간과 닮아서, 한없이 찬란하고 그토록이나 숭고한 것이다. 세상 모든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담은 해가 오늘 그의 마지막 때, 므락우의 사위를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일몰을 좋아한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일몰을 좋아했다. 등이 땀에 젖는 한여름에도, 흰 서리 같은 입김 부서지는 한겨울에도, 화등잔만한 붉은 해가 질 때마다 그 모습을 넋놓고 보곤 하였던 예닐곱 살의 나를 기억한다. 집도, 사람도, 자동차도 없는 긴 신작로 끝에서, 혹은 키 낮은 동네 지붕들 위의 하늘을 가득 채웠던 압도적인 주홍빛 해를 나는 잊을 수 없다. 너무 어렸던 탓에 일몰을 보면서 느꼈던 정서를 갈무리해줄 어휘를 알지 못하였을 뿐, 주홍빛이라는 밋밋한 표현이 송구스러울만큼 찬연한 석양빛은 어린 내게 신의 색채였고 절정의 숭고미였다.
'신의 색채'라는 다소 성스러운 표현은 이미 반 백 살 넘어 나이 든 머리에서 나온 표현이기는 하다. 기억 속 깊숙이 묻힌 어린 시절 본 적 있는 종교화의 색채가 그러하였는지 출처는 분명치 않으나, 그만큼 내게 일몰 풍경은 어려서나 지금이나 여전히 매우 종교적이고 숭고한 이미지이다. 일몰이 대표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 현상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그것을 목도하는 이에게 경외심을 품게 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압도적인 자연의 숭고미에 동화되어 저절로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픈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다.
붉게 지는 해는 일관되고 한결 같이 내게 묻는다. 너는 너의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가. 너의 하루는, 너의 매 순간은 얼마나 숭고하였는가. 어떻게 기억되고,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가.
붉은 석양 속에서 맞았던 경외심의 전율을 매 순간 기억하고 싶다. 일몰을 닮은 아버지의 숭고한 헌신을 기억하고 싶다. 언제나 연짱이를 위해 기도하였던 어머니로 기억되고 싶다. 지키고 싶고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 악착같이 움켜쥐었으나 결국, 덩그런 빈 손만 남은 허탈한 이가 아닌, 기도하는 어머니로 마지막을 맞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