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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 프래비

체류 2. '콘 까올리'와 사는 건 처음이지, 프래 

사람들은 스스로를 트렌디하다고, 나는 트렌드 세터라고 믿으며 살겠지만, 나이 든 내 눈에는 그 트렌드란 게 종종 참으로 얄팍하고, 유행 주기라는 것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아 보인다. 2년 전만 해도 어디서든 흔하게 살 수 있었던 엽서는 이제 파는 곳을 찾기 조차 어려워졌다. 그게 팬데믹의 영향인지, 혹은 말그대로 트렌드의 변화 때문인지는, 그냥 모르고 싶다. 우체국에는 혹시 팔지 않을까 기대하였지만, 혹시나는 역시나. 


"슬롭에는 엽서가 있어요, 파는 걸 봤거든요." 

"예? 어, 슬롭이 뭐예요?" 

"아, 커피숍이예요. SLOPE." 


있기는 있었다. 우리 연짱이가 그린 게 훨씬 더 나았을 것 같은 누군가 그린 고양이, 컵 그림 엽서가. 나와 우체국 직원 오빠의 커뮤니케이션의 완벽한 부재의 결과였던 것 같다. 프래에서만 살 수 있는, 프래가 담긴, 프래 엽서를 사고 싶었다고. 


이를테면, 이런 것. 프래 OTOP에서 천신만고 끝에 겨우 찾아내었다. 그래, 프래가 담겨 있는 프래만의 엽서를 사고 싶었다고. 태국 물가 대비 많이 비싼데 예뻐서 욕할 수도 없었다. 


주말 시장이 서는 토요일. 아직은 오전 시간이고, 시장이 서려면 한참 시간이 남아서 연짱이와 프래 골목을 걸었다. 


언제 찍었지, 연짱이? 웡부리 하우스가 있는 골목이었을 것이다. 


골목 구석 구석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던 프래. 


아날로그 여행을 선호하는 엄마만 좋았던 골목 걷기는 결국 연짱이의 항의와 함께 조기 종료. 덥다고 투덜거리며 연짱이가 열심히 발품을 팔아 찾은 에어컨 커피숍에서 벌써부터 따가운 오전 볕을 피하였다. 


하 . . . 할 말 정말 많은 음료들. 연짱이가 주문한 사과 스무디와 내가 주문한 노 시럽 핫 카푸치노. 


그렇다. 차고 단 음료를 마시기 싫어서 혹여나 시럽 들어간 찬 것으로 줄까봐 매우 여러 번 'NO SYRUP, HOT CAPPUCCINO' 를 주지시키고, 경험 상 그것도 못 미더워 '마이 싸이 남츠암, 마이 싸이 남딴, 아오 런 카푸치노'라고 역시 여러 번 주지시켜 주문을 하였거만. 먹을 수가 없어서 주문 받았던 언니에게 얘기하였더니, 언니는 미안해하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이 문제냐며 뻔뻔하여 연짱이 대노. 게다가 엄청 귀찮아하며 느릿 느릿 다시 만들어다 준 커피 역시 카푸치노는 아니었다. 다 식어빠지고 설탕 맛 안 나는 그냥 다방 커피. 


"엄마, 내가 구글 리뷰에 이 커피숍 아주 신랄하게 리뷰 올릴게." 

"그냥 둬. 먹고 살아야지, 저 사람들도." 

"뭘 그냥 둬. 그냥 두면 개선이 안 되잖아. 그리고 우리가 외국인이어서 일부러 그런 건지도 모른다고." 


연짱이는 참지 않아요. 


주문 과정은 이러저러하였지만, 연짱이 말대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모든 것을 다 덮는 곳이었다. 프래 체류 정리를 하다가 문득, 커피숍 창문 밖을 내다봤는데, 아치 모양 프레임 창문 밖으로 아기자기한 앞 집 식물들, 그리고 지붕 위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조곤 조곤 알아들을 수 없는 이 나라 말 몇 마디만 간간이 스민 공간과 프래에서의 나긋한 순간이 사무치도록 행복하였다. 그래서 내내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글을 쓰다 문득, 고개 드니  작은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참 파랬다. 생전 처음 온 도시, 처음 온 커피숍. 나직한 공간에 간간이 스미는 이방 언어가 편안하다. 순간이 소중하여 눈물이 났다. 내 삶에 이런 순간 늘 있기를. 빈번하기를. 바라는 바, 앞당긴 걱정으로 행복한 매 순간을 흐리지 않기를. 골목 골목 어여쁜 삶의 모든 순간을 그저 누리기를. 


그 날 일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차분히 프래 체류를 정리하는 동안, 연짱이는 저에게 보내는 손 글씨 엽서를 말그대로 고군분투하며 그리고 있었다. 아이는 여행 중 여행 도시에서 스스로에게 꼭꼭 엽서를 썼는데, 하노이에서는 베트남어로, 태국 각 도시에서는 태국어 엽서를 써 보내는 것이 저 나름의 원칙이었나 보다. 


"어린이, 또 썼어? 쓰고 보내는 건 좋은데, 나중에 집 가서 받아 보고 무슨 내용인지 기억하겠어?" 

"그럴 줄 알고 번역 내용 캡쳐해뒀어. 태국어 문맹이어서 글자 쓰기가 아니라 그림 그리기 수준이라, 이거 쓰는데 1시간 반이나 걸렸다고. 근데, 태국어는 마침표도 없고, 끊어 쓰는 데도 없어서, 어디까지가 문장의 끝인지 봐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임의로 막 끊어쓰고 그래가지고 제대로 쓴 건지도 의심스럽지만, 일단 썼다는 것에 의의를 두려고." 


저렇게 쓰기 어렵지 않나? 태국어는 글자마다 비슷한 게 너무 많고, 획 하나만, 글자 위에 점 하나만 안 찍어도 다른 글자가 되는 것 같던데. 신기한 아이. 


"엄마, 내가 글자를 또박또박 그렸나 봐. 내가 쓴 것 사진 찍어서 태국어 번역기 돌렸더니, 영어로 써서 태국어 번역기 돌린 것보다 번역이 더 잘 돼. 정자체인 건가?" 


귀국하니 우리보다 일찍 도착하여 우편함에서 얌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엽서를 보고 연짱이가 한 말이었다. 외탁의 좋은 예랄까.  


슬슬 토요 시장이 서는 거리로 가 볼까. 


토요 시장이 서는 웡부리 하우스 쪽 거리에 들어서 보니, 오전 볕을 피하여 들어간 커피숍에서 꽤 오래 앉아 있었는데도, 개장이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나 보다. 여적 한창 준비 중이었다. 웡부리 하우스 약간 대각선 맞은 편에 있는 'THE OWL SCHOOL'에서 토요 시장이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한 시간 남짓 앉아 있기로 하였다. 


"엄마,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거 생각보다 재밌어." 

"그럼.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이것 저것 관람하고 투어하는 것도 여행이지만, 또 이렇게 소소하고 한가로운 순간도 있어야 지치지 않지." 


커피가 유난히 맛있다거나 환경이 엄청 쾌적하다거나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세상 그 어디도 아닌 프래라는 곳, 그 프래에서도 굳이 이 커피숍 공간에 연짱이와 함께 앉아 있어서 특별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익숙한 우리 동네 손 때 반들한 우리집이든, 혹은 손에 닿는 결이 문득 낯선 동네이든, 연짱이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아이에게도 내게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특별한 일상이고 특별한 순간이어서 새롭고 소중한 것 아니겠나. 


"앗, 엄마, 코코넛 아이스크림이야! 사 줘, 엄마!" 


연짱이가 부르짖었다. 내게도 연짱이에게도 3년 전 태국 나컨파놈에서의 좋은 기억은 온전히 코코넛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주었던 터라, 코코넛 아이스크림 하나에 마음이 정오 햇살 아래 눈처럼, 아니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프래 토요 시장은 악세사리나 자잘한 소품들은 품질 면에서 조악하였고, 특별한 볼거리나 먹을거리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아서 새롭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재미 있었다.  


"엄마, 도시마다 주말 시장에 나오는 품목들은 거의 똑같은데, 구경은 늘 재미있고 신나." 


시장이니까요. 


숙소 베란다에서 바라 본 풍경이다. 빨래를 널다 말고 멍, 하니 석양 풍경을 보고 서 있었더니, 연짱이가 나와서 찍어주었다. 세상 모든 석양 풍경은 뭉클하다. 내 아버지, 혹은 내 삶 한 귀퉁이의 회한을 보는 느낌이어서 서글프기도 하고. 


우리 프래비. 잊고 있었다. 토요 시장 보려고 걷다가 꼬질꼬질하게 버려진 것을 연짱이가 주워서 데리고 왔다. 세제로 깨끗하게 씻겨주고 일광욕시켜 뽀송하게 말려주었다. 


"프래에서 발견한 래빗이니까 프래비, 라고 이름 지어주자. 그런데, 잃어버린 누군가가 애타게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이 편치 않아." 

"쉽게 찾으라고 누군가 일부러 눈에 잘 띄이는 담벼락 위에 올려놓은 것 같던데, 사람이 그렇게 많이 지나다녀도 그대로 있었잖아. 더구나 얘 뒷목이 터져 있어. 원주인이 그닥 소중하게 다뤘을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아. 우리집에 입양와서 집에 있는 아이들하고 어울려 사는 게 더 행복할 걸. 우리는 함부로 버리지도 않고, 일 년이면 몇 번 씩 일광욕 시키고, 애지중지 대해주니까. 미미 할머니가 잘 왔어, 하고 따뜻하게 맞아줄거야. 뒷목 터진 건 집에 가서 내가 꿰매주면 돼. 엄마의 걱정은 명백한 기우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명백한 결론을 얻은 연짱이. 반가워, 프래비. 남은 여행 내내 함께 하자. 넓은 세상 보고 비행기 타고 우리집에 같이 가자. 


프래비는 현재, 우리집에서 다른 인형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우리집에 오게 된 아이들과 나와 연짱이를 포함하여 우리집 공간에 깃들어 사는 모든 것들, 그리고 공간까지도 모두 조곤 조곤 행복하고 안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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