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게 입어."
Playlist.
“오늘 춥더라.”
말에는 힘이 있다. 아프지만 그게 사실이다.
작년 초, 장편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보령에 있는 작은 섬 장고도로 들어갔다. 대천항에서 하루에 적으면 두 번 많으면 세 번 그 섬으로 향하는 배가 떴다. 가장 첫 시간의 배를 타고 가면, 항상 표를 끊어주시는 분께서는 내게 물었다.
"거기에는 왜 가요?"
"영화 촬영하러 가요. 몇 달 뒤에 거기서 촬영하거든요."
"몇 살이에요?"
"저 스물여섯 살입니다."
하는 말들이 오고 갔다.
봄이라기에는 춥고 겨울이라기엔 따스했던
그곳에는 미련과 사랑이 있었다.
장편 영화의 미술감독으로 참여를 했기에 촬영을 예기한 집을 정리하고 그에 맞게 꾸며야 했다. 내가 담당해야 했던 그 집에 거주하셨던 노인 분께서는 이미 생을 떠나셨다. 그렇게 할머님께서 떠나시고, 집이 방치된 상태로 이 년이 흘렀다. 바닥에는 지네의 사체들과 거미의 사체들, 쥐 똥들이 가득했다. 냉장고 안에는 먹다 남긴 음식물들이 가득했다. 다 드시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들. 창고에는 알 수 없는 장이 항아리에 들어있었다. 부엌 옆에 걸린 달력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육지에서의 시간은 흘렀는데, 이곳만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닥과 구석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맨발로 들어갈 수는 없던 그곳을 신발을 신고 들어가 정리하기 시작했다. 깔려 있던 이불이나 매트에는 끈적한 이물질들이 남기고 떠난 미련처럼 남아있었다.
보령의 섬, 장고도에는 콘크리트로 된 잿빛의 아파트들이 전혀 없었다. 비어있던 집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두 제 각기의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옆 집의 온기를 빌려온 탓인가 그들은 차갑게 식지 않았다. 서울의 집들은 대부분이 차갑고 딱딱했다. 나는 그곳에서 자라 그곳을 거의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살아온 세상은 거진 차가웠다. 서로를 혐오하고 싫어하게 되는 이 세상에서 결합을 원했다. 그런 내게 섬 촬영은 강제적으로 분리라는 경험을 하게 했다. 저 바다 너머로 멀리서 보이는 안면도의 건물들은 화려한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들은 분명 뜨거워 보였는데, 그 안에 감춰진 잿빛의 건물들은 차가웠다. 이곳은 그 흔하디 흔한 것들이 없었다.
안면도에 잿빛 건물들이 늘어선 모습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그런 건물들을 관망하고 있으면 건물도 생명이라고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저 안에는 숨을 쉬고 있는 존재들은 말랑하고 따스한 숨을 뿜어내는 존재들일 텐데, 그들을 감싸고 있는 건물들을 단단하고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어째서 사람들은 점점 딱딱하고 온기가 식어가는가. 노후화된 건물은 녹이 슬고 물때가 깊게 스며들어 얼룩덜룩해진다. 사람의 마음도 매한가지이겠지. 감정이라는 것은 순간의 비바람이 아니라 지속된 날씨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지속된 장마철처럼 순간의 물방울들은 어딘가를 침수시키는 홍수가 되기도 하고, 지속된 건조함은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가뭄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감정은 우리를 더 눅눅하게 하거나 더 건조하게 했다.
섬의 비바람은 매서웠다. 언제 한 번은 너무 거세게 불던 비바람 탓에 배가 뜨지 않아 그곳에 고립이 됐다. 옥상에서 칠흑의 바다를 보고 있으면 제대로 서있기도 힘든 바람이 나를 밀어냈다. 철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내 표지판이 흔들렸다. 컹컹 대는 들개 짖는 소리는 제 두려움에 이기지 못해 짖는 소리였다. 짖을 때마다 그들의 목에 걸린 쇠사슬이 철컹댔다. 산에서 내려온 안개는 눈앞을 막았다.
아침엔 지난날의 비를 무시하듯 꽤 따스했다. 그때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따뜻하게 입어.”
날이 쌀쌀해서 웃옷을 입으라는 어머니의 말에는 사랑이 있다. 녹색 옥상에서 바라보는 햇살은 도무지 따스하기만 한데, 어머니는 그 잠깐의 추위가 걱정이 되셨나 보다. 딱딱해 보이는 그 문장 안에는 말랑한 사랑이 고농축으로 묶여있다. 내가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에 비하면 내가 어머니께 드린 사랑은 일종의 떨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즈음은 비참하고 참혹한 고통이 온몸을 통해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랑은 분명히 존재한다.
옥상에 서서 건물들을 바라보면 모두 제 각기의 색과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건축자의 의도가 들어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건물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차갑다. 어느새 회색 빛의 고층 건물들만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 비싼 건물들. 문장은 화려해져 가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진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장고도의 집들은 조금 달랐다. 옛 가옥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집들도 있었고, 신축으로 지은 듯 깔끔한 형태의 집도 있었다. 뒷 산에 있던 언덕 위에 있던 집은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 같은 그런 집이었다. 어딘가는 컨테이너로 지은 집도 있었다. 그런 문장과 건물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감정은 비싸지 않다. 말은 비싸지 않다.
따뜻하게 입으라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저려오는 연유는 사랑을 알기 때문이고 사랑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차가운 눈이 내린다. 눈이 눈자위에 떨어져 녹아버리는 그 찬란한 순간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마주하고 싶었다. 이 말을 하지 못해 그저 “눈 좋아해.”라고 치부해 버렸다. 내 감정이 비참해질 수 있으니 치사한 방법을 쓴 것이다. 솔직하지 못한 내 말들이 문장에서는 솔직할 수 있으니 건물과 같은 거다. 딱딱하고 차가운 문장 안에 말랑거리는 사랑을 담아낼 수 있으니.
그럼에도 우리는 그 말랑거리는 것을 꺼내어 보여줘야 한다. 건물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숨겨져 있는 것은 비로소 진심을 잉태하지 못할 것이니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랑이 있지만서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유는 결국, 그 단어를 입 밖으로 토해내었을 때 느껴지는 그 말랑거림에 있겠지.
섬에서 다녀온 후로는 알 수 없는 절망감과 허무함이 도래됐다. 조금 더 솔직하게 좋지 않은 생각까지 했다. 내가 소멸해도 이 세상은 흘러갈 것만 같았다. 그때 다시 어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자꾸만 그녀의 음성이 들린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힘이 들 때에는 하늘을 보라던 그 음성. 하늘을 보았고, 푸르기만 했다. 아름다웠고 찬란했다. 섬에서 보았던 그 하늘이 떠올랐다. 비릿한 그 바다 냄새가 코 끝을 적셔왔다. 초 봄이라 매서운 바람이 불었던 그 갯벌이 생각났다. 민규 형과 해성이 형과 함께 옥상에서 먹었던 아침 라면이 생각났다. 그 저녁에 보았던 밤하늘이 떠올랐다. 제 각기 빛나는 별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조금 더 사랑해야겠다.
사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