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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하게 사랑하는 것

나는 그럴 힘이 없었다

by 천윤준호

예민한 관찰 일지 _ 다섯 번째 이야기


Playlist _ Afternoon in Great Britain _ ZunHoZooo



버석 - 버석 소리 내는 가을철 낙엽들은 사랑에 물들었다.


녹색과 노란색 스테인글라스로 뒤덮인 교회의 창문에는 빛을 받아 반짝였고, 잠시 쉬었다가 가라는 정지 표지판과 점멸하는 신호등의 별빛은 냉정한 밤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음이 분명했다.


나무 이파리 사이로 제 모습을 알아봐 달라는 듯이 광명하는 가로등 불빛은, 무엇을 그리도 밝히고 싶었을까 생각했다. 모두 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인데, 그들은 나의 사랑을 알아차릴 턱이 없는 노릇이었다. 갈라져 벗겨진 녹색 주차장의 민낯과 서늘한 냉기를 머금고 있는 군대 철문의 피부처럼 세상은 한기를 가지고 있었다.


연말의 분위기를 한껏 멋 부린 동네 식당과 카페들은 각기의 조명으로 밝은데, 그 뒤에 자리 잡은 낡은 짐수레에는 녹슨 노인이 추위에 떨고 있다.


그들을 밝힐 수 있는 건 그저 찢어져가는 종이 상자 같은 거였다.


사랑에는 책임이 필요했고, 나는 그럴 힘이 없었다.


도리어 보면 무책임하게 사랑하는 것을 오래되어 바꿀 수 없는 습관처럼 가져갔다. 내가 그들의 안위나 행복을 바랄 수는 있어도 그 아이들의 행복을 챙겨줄 수는 없었다.


해 질 녘 교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주홍색 볕이 그렇게도 벅차게 다가왔다. 신발주머니를 한껏 돌리며 지나쳤던 은행나무 거리에서는 사람들에게 짓밟힌 은행들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몇 분의 아주머니들은 떨어졌지만 멀쩡한 은행들을 검정 봉지에 주워 담고 있었다. 저렇게 고약한 냄새를 머금은 은행이 뭐가 그리 좋다고 주워 담지 - 이해하지 못할 생각을 했다.


형과 함께 더러워진 실내화를 벅벅 닦으며 서로에게 물을 튀겼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낡아 쓰지 않는 칫솔로 묵은 때를 열심히 닦아내고 나면 팔이 저려왔지만 괜히 뿌듯했다. 학교 앞 신호등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으면 저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도 반가워 내 앞에 도달하기 전부터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었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가끔 팔던 달고나(그때는 뽑기라고 불렀다. 왜 뽑기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다들 뽑기라고 불렀다.)를 며칠을 모은 동전으로 하나 사, 입에 물고 집에 갔던 날들이 기억난다. 매 해에 했던 동네 야시장에서 형과 함께 금붕어를 잡았다.


간혹 할머니께서 집에 방문하셨을 때엔 할머니와 함께 야시장으로 향해 거대한 대왕 달고나를 사달라고 은근히 표현했다. 그렇게 한 번은 거대한 금붕어 모양의 달고나를 뽑았는데 도저히 먹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냉장고로 향해 몇 달을 묵혀뒀다.


나는 그 순간들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어릴 적 사랑했던 그 순간들은 가끔 꿈에 불쑥 나온다.


사랑했던 그 길을 지나칠 날이 생기면 괜히 그곳으로 돌아가 조금 천천히 걸었다. 그러면 괜히 몽글해지는 기분에 가슴이 아려왔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참 많이도 변해있었다. 그 사랑을 느끼는 나 역시 너무 많이 변했다. 그 사실이 안쓰러웠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새치기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럴 때면 내가 아꼈던 그 기억들이 눈치를 줬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은근히 눈치를 주며 나지막이 그림자를 보였다. 그림자가 있다는 건 뒤에 빛이 있다는 거니까 그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책임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스름한 밤에 보이는 나무의 앙상한 잔가지를 기억하는 거다. 저 나무의 잔가지는 저 모양이었구나.


사랑하면 기억하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거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해야겠다. 그렇기에 문장으로 옮겨 적는다. 최대한 많은 것들을 기억하며 기억에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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