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6 아낀다는 건 결국에 소멸하는 것들이다.
나의 글들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다면 사랑을 주로 쓴다고 소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어찌 되었든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성 간에 느끼는 사랑뿐만이 아니라 우리 저변에 깔려있는 공기 같은 것들을 주로 내가 주로 쓰는 거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어릴 적부터 사랑을 쉽게 느꼈다. 사랑뿐이 아니라 감정 자체를 민감하게 느꼈다.
‘무언가를 아끼는 것’이 사랑하는 거라고 한다면, 나는 참 많은 것들을 아껴왔다.
까드득 - 옆에서 이를 갈며 자고 있는 쌍둥이 형이나, 퇴근하고 소주 한 잔을 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과 술잔을 함께 기울이지는 않지만 그 옆자리를 지키던 어머니, 학창 시절 여행길이면 밥알이 많이 들어 곧 터질 것 같은 유부초밥을 싸주시던 어머니, 형과 만들어냈던 가상의 존재 뉴뉴와 냐냐(우리는 각자의 손을 보고 이름을 붙였다.) 멍하니 봤었던 노을이 예쁜 하늘과 갑자기 왔던 태풍, 그리고 그 태풍이 지나가 떨어진 나무들, 학교를 가는 토요일마다 하교 후에 먹는 포장마차 순대, 떡볶이와 가끔 외식을 할 때 가던 골뱅이와 치킨을 같이 팔던 그 식당, 일 년에 한 번이라도 겨우 보려고 하는 고등학교 친구들, 술에 취한 모습이 웃기다며 찍었던 나의 모습, 봄이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벚나무들, 좋은 해적은 실존한다며 좋은 해적이 되고자 했던 그 시절의 꿈을 아꼈다.
나는 그들을 사랑했는데, 그들은 나를 떠나갔다.
내가 아끼는 것들은 왜 종말을 맞이해야 했을까.
'이 쪽지를 본다면 티브이 밑에 있는 서랍을 열어보시오.'
라고 하는 쪽지를 형과 주고받았다. 학원 시간이 겹치지 않았던 쌍둥이 형과 했던 일종의 쪽지 찾기 놀이였다. 그렇게 모든 쪽지를 찾고 나면, 마지막 쪽지에는 긴 편지가 있었다. 사랑을 고백했던 쪽지였다. 오늘도 고생했다며 서로에게 직접 말로 전달하지 못한 말들을 적어냈다.
아낀다는 건 결국에 소멸하는 것들이다.
영원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을 소원하는 건, 결과에 대한 마음보다는 그 과정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함께 보내왔던 시간을 영겁처럼 대하는 거다. 그렇게 아끼면서 살아왔는데, 세상은 나를 아끼지 않은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무디게 반응하지 않는 내 성향 탓에 이들은 냉담했다.
점점 세상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예민하다는 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느끼는 것이었다.
주변의 상황에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는 건 작은 슬픔을 크게 느낀다는 것이었고, 쉽게 우울해지고 쉽게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그 예민한 성격 때문에 무던하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들도 어렵게 이끌어가야만 했다. 어릴 적에는 표정에 대한 충고 아닌 충고를 많이 들어야 했다. 매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속으로만 앓고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표정이 잘 숨겨지지 않았다. 그 앓던 것들이 표정으로 드러나게 되면 항상 타인에게 해명해야 했다.
“기분 나빠?”
“아니에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라는 대화의 흐름은 언제나 비슷한 클리셰처럼 다가왔다. 내 기분이 안 좋은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화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고, 억울하고, 심술이 나도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나쁜 기분이 표정으로 순식간에 드러나고 말았다. 화를 내지 않았어도 내 표정에서 그 감정이 보였기에 나는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말했다.
“사회 생활 하려면 그러면 안돼.”
“표정을 숨겨야지.”
“다 너같이 드러내면서 어떻게 살래?”
라는 조언을 스스럼없이 이어갔다. 물론 도움은 되었다.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 무난하게 넘어가는 상황이 더러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상황을 무마하고 넘어가면, 나는 점차 사라져 갔다. 표정을 숨긴 후에 잃어버린 나를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들은 없었다.
“표정을 숨긴 그다음은요?”
누구에게도 묻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게 울지 말라고 할 뿐, 제대로 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표정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애초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 연습을 했다. 같은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방법은 없었다.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는데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그 말들을 보다 덜 나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았다. 그건 타인의 성격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르게 태어나 다른 상황 속에서 삶을 영위했다. 각기 다른 가치관과 성격 유형들을 지니고 있으니 서로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난 형과 나도 이렇게 다른데, 저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거진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거다.
저 사람은 그저 저런 말들을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넘기는 거다. 일종의 방어기제였지만 도움은 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인정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완벽하게 나아지지는 않아도, 찰나의 감정은 숨길 수 있었다. 그럼 다시 의문이 생겼다. 내가 그들 역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나와 맞지 않아도, 나와 너무나도 다른 세상에서 다른 호흡을 내뱉고 있던 이들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해낼 수 있는 걸까.
사랑을 하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가장 큰 조건은 고등학생 때 알게 되었다.
그건 그냥 사랑하는 거였다. 나를.
어릴 적에는 자존감이 낮은 편이라 사랑을 갈망했다.
며칠 굶은 강아지가 음식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이나 으르렁 짓는 것처럼 허기진 사랑을 열망했다.
자존감이 낮아진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가 어릴 적부터 숨 쉬듯 겪어온 비교 때문이었다. 쌍둥이 형과의 비교. 그중에서 나는 외적인 비교를 많이 당했다. 외적인 면은 내가 결정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태어난 것이며, 누군가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들의 목적이 ‘비하’가 아닌 ‘비교’였음에도 어린 나의 자존감을 낮추는 데는 아주 크게 동조했다. 그래서 사랑을 갈망하는 그 대상들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예를 들면 외적인 것들이 컸고, 내게 비워져 있는 것들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생각의 폭을 넓혀줄 수 있는 존재,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함을 가진 존재. 하지만 그런 존재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내게 있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탓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타인이 내게 건네는 사랑에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왜 좋아하지?’ ‘나는 너무 못난 사람인데.’ ‘언젠가 나를 떠날 거야.’ 이런 못난 생각들이 좀벌레처럼 야금야금 나를 갉아먹었다. 그렇게 다 먹어 치울 때쯤, 나는 죽을 거야. 생각하면서도 그 좀벌레를 잡아줄 존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없었다. 없을만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누구도 내게 사랑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나를 사랑하는 건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해본 적이 없으니 시도조차 난항을 겪었다. 많은 시도들 중에 도움이 되었던 건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보며 '사랑해.'라고 말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오글거리고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사랑해.'라고 내뱉고 나면 웃음이 났다.
그렇게 며칠을 반복했다. 등교를 하면서도 혼자 사랑한다면 연신 외쳐대면 그 모습이 웃겨 웃음이 나왔다. 어느 순간이 되니 나를 조금 더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이런 눈을 가졌구나.'
'나는 이런 목소리를 가졌구나.'
'나는 웃을 때 이런 표정으로 웃는구나.'
'내 눈과 코 사이에는 점이 있구나.'
나를 관찰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완전한 사랑은 아니지만 조금 더 나를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거다.
그렇게 소멸하는 것들을 다시 아껴본다.
지난 날 내렸던 비 웅덩이에 첨벙 거리는 아이가 있다.
웅덩이 안에 있던 붉은 조명이 그 아이의 발 움직임에 따라 일렁였다.
'너는 그런 모양이었구나.'
결국 소멸해 가는 것들을 영원히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