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8 내 삶이 부끄럽습니다
세상은 전시 상황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불순물이 섞인 피를 토해내는데 다들 외면한다. 서로의 피를 먹고 자라는 식인 유기체마냥 서로를 죽이고 먹어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탓한다. 하지만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 진실은 그렇게 죽었다.
뉴스를 보면 서로를 혐오하여 나온 범죄들에 관련된 내용이 즐비했다. 묻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점차 들어갔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 안에서도 수많은 전투가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좋지 않은 소문에 연루되어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대학 신입생이 되던 해에 시위를 나갔다. 자의적이지는 않았다. 수업 사이에 시간이 비면 그 시위에 동참해야 했다.
언제는 수업을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영화를 찍지 못하게 했던 적도 있었다. 대학가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수많은 욕설이 귀에 들어왔다. 술에 취한 이들의 목소리는 꽤 컸다. 감정이 격해진 탓이었던가 그들은 앞에 있던 이의 멱살을 잡았다. 맹수의 눈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분노를 노려봤다.
동물의 왕국처럼 스스로의 본능만을 중시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싸움을 했다.
때론, 지하철을 타면 나는 빨갱이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한 노인이 소리를 쳤다. 소리는 그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뚫고 지하철을 삼켰다.
"탄핵을 반대한다! 다 빨갱이 새끼들이야!..."
나는 그저 그 시간에 지하철을 탔을 뿐이었다.
출근길에는 피시방 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보기도 했다. 추운 날씨였는데 옷차림은 가벼웠다. 무슨 이유에 설까 그녀는 울고 있었다. 꽤 이른 시간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혼자였다.
물리적인 전투가 항상 만연한 건 아니지만, 그 안에서 서로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다. 겨울잠에 들었던 생명체들은 봄이 되면 제 분신을 쏟아내는데, 난 이 난세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통탄의 영혼을 담아낸 날들은 에누리 없이 잠식되었다. 한없이 차가워지는 세상 속에서 제 묏자리를 알아보는 늙은 노인처럼 무력감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온갖 가짜 뉴스들과 이름 모를 사람들의 칼날이 사람들을 잘라요. 인터넷이나 SNS에서는 자신의 피상적인 삶이 전부인 것처럼 보여주고 그를 부러워하기를 바라요. 자신을 감추고 숨기고 그 안에서 몰래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렇게 잘라낸 살점들이 결국 자신의 육신인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에요.
부끄러워요. 내 삶이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사랑했습니다.
이 전쟁통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얼까요,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걸까요.
온 세상이 겨울 같아요. 쉽게 어두워지고, 쉽게 차가워져요. 그런데 제가 본 겨울은 흰 눈이 가지고 있는 말랑거리는 사랑이었어요. 첫눈에 기뻐하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그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젊은 엄마에게서 말랑거리는 사랑을 봐요. 차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는 늙은 아버지가 내뿜는 호흡에서 사랑을 봐요. 제가 바라본 겨울은 그렇게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 건데, 사람들은 차가운 것만 보나 봐요.
자신의 차례도 아닌데, 새치기를 하고 교활하게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기 급급한 것 같아요. 저도 고약한 성격을 가진 탓에 어둠 안에서 사랑을 보기는 힘들어요. 그래도 어둠도 사랑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사람이 적은 밤이 더 좋거든요. 밤이 주는 그 느낌과 밤에 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걷는 건 그 자체로 밤의 품에 안기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밤의 관심을 바라다보면 어느새 새벽이 스멀스멀 올라오긴 합니다. 오늘 하루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탓인지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아요. ‘그럼 뭐라도 더 하지 그랬어.’ 하고 다그치는 제 분신이 내일의 제 분신보다 앞서 새치기하여 괴롭힙니다. ‘그래도 자야지. 내일 더 열심히 살아내지.’ 하고 잠에 들면,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많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배어든 사랑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거든요. 사람들은 빛을 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둠은 악한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어둠이 좋습니다. 밤에는 빛의 양이 적기 때문에 집중해야 할 것들이 보입니다. 신호등의 불빛이나 어두운 골목길에 체념한 듯 비추는 가로등 빛 같은 거요. 그런 소규모의 빛을 보고 있으면 사랑이 정갈하게 영그는 것 같아요.
고약한 향이 흐르고 피가 낭자하는 이 세상에서 무관심도 폭력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마주하려 합니다. 마주하지만 그 안에서 다른 사랑의 존재도 보려고 합니다. 지나치는 길 고양이를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사랑이잖아요. 차가워 보이는 저 쇠로 만들어진 세상도 만져보면 그 안에 상처들에 깊게 스며든 사랑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혼자 여행을 갔을 때 도로에 눕는 것처럼 말이에요. 도시를 떠나 욕설이 멈춘 그곳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새벽에 도로에 누워있으면 별들이 보여요.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그렇게 누우면 침대보다 포근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딱딱한 냉기를 가지고 있는 아스팔트이기는 하다만, 꽤나 새로운 기분이 들어요. 눈에 스며든 별들이 난시를 고쳐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선명하게 보이는 그 별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의 이름은 사랑이라고 짓기로 해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을 보여주는 순간에 이름을 고백할 것이니, 사랑이라고 지어봅니다.
그렇게 그 도로에 제 흔적을 남깁니다. 실제로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누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거면 만족하겠습니다. 세상을 내가 살아내고 있다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그 하찮은 사실을 제가 알면 되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