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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와 나의 생

하루가 남기는 작은 무늬

by 김남정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전부 사라져 버린다."

짧지만 무게감 있는 문장이다. 인생의 모든 고통과 비밀, 심지어 죽음조차도 이 문장 안에서 고요히 정리되는 것 같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 갈수록, 이 문장이 더 크게 다가온다. 결국 사람을 지탱해 주는 건 화려한 성공이나 재산이 아니라, 누군가와 주고받는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나이 듦은 단순히 흰머리가 늘고 관절이 굳어가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는 힘을 배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돌아보면 예전에 작은 일에도 금세 속상해하고, 오래 마음에 담아 두기도 했다. 누가 던진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기분이 망가진 적도,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에도 쉽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감정을 쏟아내는 대신, 차분히 흘려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지. 화가 나도 금세 흘려보내고, 서운함이 밀려와도 '이 또한 지나가겠지' 하며 가볍게 내려놓게 된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나무는 세월을 버티며 나이테를 만든다. 그렇다면 사람의 나이테는 어디에 남을까. 나무의 나이테는 눈에 보이지만, 사람의 나이테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것을 '태도'와 '표정' 속에서 알아차린다. 어려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기쁨과 슬픔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무늬가 새겨진다. 긴 세월을 견딘 나무는 거친 껍질 속에 단단한 결을 간직하듯, 사람도 삶의 고비마다 감정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따라 무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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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무늬가 바로 '감정 조절의 흔적'이라고 믿는다. 화를 억누르거나 억지로 웃음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기쁨을 기쁨으로 맛보되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힘. 그것이 쌓이고 켜켜이 더해져서 결국 한 사람의 나이테가 되는 것이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가 어른이 되어가며 배운 것도 바로 그런 힘이었다. 그는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나는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해지고 싶지는 않다."


이 솔직한 고백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행복을 찾을 수 없지만, 불행 속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망은 누구나 같다. 그 소망을 지켜내려면, 나이테처럼 단단하게 쌓아 올린 자기만의 감정 조절법이 필요하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도, 피할 수 없는 상실도 찾아온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가고,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어떤 태도로 하루를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기분 좋은 하루, 조금 힘든 하루. 커피 한 잔 앞에 앉아 있는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내 안의 나이테가 어떤 무늬로 자라 가고 있을까. 화를 다스리는 법, 상처를 안아주는 법, 기쁨을 오래 간직하는 법을 배우면서 나만의 결이 생겨가고 있는 것일까."오늘 내 나이테는 어떤 무늬로 새겨졌을까?"


삶은 한 번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나이테를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나답게 산다는 것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살아가야 한다."<자기 앞의 생>

이 문장을 조용히 되뇌며 오늘의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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