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ngo Mar 31. 2017

인도에서 커피 장사를
시작하였다.

부처님의 마을 인도, 보드가야에서 커피를 만들며 지낸 이야기

난 무언가를 결정할 때 친한 친구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가볍게 물어보면 속이 깊은 내 친구들은 심사숙고해서 의견을 내놓는다. 하지만 항상 결정은 내 가슴속의 이야기를 따른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북처럼 커다란 울림은 아니었지만은 오랜 친구와 꿈꾸었던 것을 작게나마 시작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하기로 했다.


지난해 풍성하게 달린 낙엽이 갈색으로 변할 무렵 나는 드디어 인도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인도의 작은 마을 보드가야에는 15년 지기 인도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나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곳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 원대한 꿈이 과연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우리는 시작을 해보기로 했다. 친구는 13살 때 작게 시작한 티베트 식당이 이미 20년이나 되었기에 인지도를 착실히 쌓아 놓았고, 나는 그저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여놓고 한 구석에서 커피를 팔며 조금씩 케이크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우리들의 원대한 꿈만 가지고 커피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도 없이 델리 공항에 도착하였다.


먼 곳에서 델리까지 기차를 타고 20시간을 달려온 친구는 나의 도착 시간에 맞춰 공항 밖에서 6시간을 기다렸다. 짐을 찾고 서둘러 나왔지만 나를 환대해 줄 줄 알았던 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공항 출구 앞에 있는 공중 전화기에 다다른 순간 창 밖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친구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인도 홍차인 짜이를 즐겨 마시는 친구는 커피에 대해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우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낸 커피 머신 판매 회사로 세 바퀴가 달린 교통수단인 오토릭샤를 타고 델리 외곽으로 나갔다. 주소만 가지고 간 3층짜리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사무실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가 들어간 그곳은 생각보단 괜찮아 보이는 곳이었다. 인도 사람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곧 사무실 한편에 있는 커피 머신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사무실의 크기는 작았지만 본사를 인도 남부의 벵갈루루에 두고 있는 꽤 이름이 있는 회사였고, 전시되어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 중에 은색으로 반짝이고 있던 머신으로 만든 향이 깊고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커피 머신과 그라인더를 구입하기로 결정하였고, 회사에서 알려준 커피 빈을 판매하는 곳으로 가서 커피빈을 주문하고는 보드가야로 가는 스무 시간의 기차에 올랐다.


내가 보드가야에 도착한 때는 10월,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였고, 식당은 한산했다. 10일 안에 온다던 커피 머신은 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20일을 보내고 난 후 갑자기 조그마한 트럭이 식당에 도착했고, 거대한 나무 상자 안에 커피 머신이 담겨 있었다. 



힘겹게 힘을 모아 커피 머신을 옮겼고, 엔지니어가 커피 머신을 설치하러 오기 전까지는 절대 포장을 뜯지 말라는 소식을 듣고는 마냥 엔지니어를 기다렸다. 그는 머신 도착 후 3일 만에 이곳에 와서 커피 머신을 설치하였다.


사실 커피머신이 와서 장사를 시작하는 것도 나에겐 하나의 고민이었다. 그동안 24시간씩 누리던 나의 자유시간이 없어지는 것이자, 치열한 장사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모험이었다. 이해는 달라이 라마의 커다란 티칭이 있는 해였고, 말로만 듣던 그것을 내가 몸소 체험해야 한다는 두려움 또한 있었다.


게다가 난 2년 넘게 기계를 만져보지도 않았다. 


'아, 과연 내가 커피를 만들 수 있을까. 커피머신은 잘 작동할 것이가...'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스무 명 남짓의 인도 소년들은 호기심 가득 한 눈으로 기계에 빙 둘러 내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고, 드디어 첫 에스프레소 샷을 내려 커다란 카페라테를 만들어 보았다. 다행히 거품이 풍성히 일어났고, 소년들은 난생처음 보는 카페라테와 카푸치노를 맛보고 싶어 했다. 이곳은 인도 북동부 비하르 주의 작은 시골인 보드가야. 그럴만했다.


모두 힘을 합쳐 커피 머신을 나르는 모습


날은 아직 뜨거웠고, 항상 붐비는 모습만 보였던 식당도 한산했다. 뜨거운 날씨에 뜨거운 커피를 마실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1월 초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티칭 때문인지 11월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 한산한 시기에 난 케이크를 굽는 연습을 하였다. 항상 밖으로만 나도는 직업을 가진 나였기에, 집안일 부엌일엔 너무 서투른 나였다. 난 그동안 빵과 케이크를 틈틈이 배워왔지만 나의 수준은 홈베이킹 수준도 안 되는 완전 초보자 수준이었다. 전기가 귀한 인도에서 오븐을 돌리고 돌려도 나오는 나의 빵은 풀이 죽어 부풀어 오르지 않았고, 그동안 배운 여러 케이크를 만들었지만 보통은 겉이 새까맣게 타서 나오기가  일 수였다. 너무도 실망을 한 나머지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는 나에게 부엌과 오븐을 빌려준 나의 인도 친구는 나에게 계속 연습하면 될 것이라고 했지만, 하루에도 반나절 이상 전기가 나가는 이곳에서 괜한 전력 낭비나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몇 번이나 들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다가 드디어 몇 개의 시그니처 메뉴가 나에게도 생겼는데, 첫 번째는 인터넷에 떠 있는 여러 레시피를 따라 해 보다가 만들어본 쫀득쫀득한 브라우니였다. 아직 온도 조절을 못해 타버린 겉 부분을 떼어내고 보니 몇 조각이 나오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첫 번째 브라우니는 바로 그날 다 팔렸다. 그러다가 이틀 동안 다른 것을 연습하느라 브라우니를 만들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 브라우니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며 빨리 만들어 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신나게 브라우니를 만들었고, 그 브라우니는 반드시 매일 만들어야 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두 번째는 비건 당근 컵케이크였다. 당근을 채 썰어 듬뿍 넣고 코코넛 가루를 넣어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불교 신자가 많은 곳이라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세 번째는 비건 초콜릿 컵케이크로 맛있게 만들려고 윗부분에 메이플 시럽을 바르고 하얀 아몬드 가루를 부셔서 올렸더니 그만 이 하얀 것이 마늘이냐고 묻는 여행자를 발견하고는 그다음부터는 아몬드를 뿌리지 않고 그냥 내놓았더니 오히려 더 잘 팔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건 녹차 초콜릿 파운드케이크를 끝으로 이 네 가지로 그 겨울을 났다.


사실 이곳에서 베이커리를 담당하는 친구들은 따로 있었다. 오래전부터 모하메드 레스토랑은 김이 뜨겁게 나는 커다란 애플파이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그 애플파이를 만들고 있던 분이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이제는 그분의 아들이 이곳의 베이커리를 맡고 있었다. 그의 아이템은 실로 다양하여 초콜릿 케이크부터 애플파이, 아몬드 케이크 그리고 그 유명한 초콜릿 볼 등 많은 케이크를 팔고 있었고 난 그들이 올려놓은 케이크 옆에 작게나마 내가 만든 케이크를 올려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고 있던 전기가 필요 없는 가스오븐을 함께 사용하게 되어 이젠 전기가 언제 나갈까 하는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만든 카페 라떼


어느덧 12월이 시작되고 있었고, 보드가야의 거리도 티베트 시장이 하나둘씩 서기 시작했다. 고전 의상을 입은 티베트, 부탄, 미얀마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승려 차림의 순례자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도 바빠졌다.


어색한 모습으로 놓여 있는 내가 만든 브라우니와 녹차 초콜릿 파운드케이크 그리고 당근 코코넛 컵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어쩔 때는 케이크 주문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실패의 연속 끝에 이제는 가스 오븐의 온도를 맞출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12월 중순에 커피를 만들 줄 아는 소년 하나가 들어와 그에게 한가한 시간에 일을 맡기고 난 케이크를 만들었다. 


티벳음식하면 뜨거운 국물의 뚝빠


드디어 1월에 달라이 라마의 티칭이 시작되었고, 한꺼번에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우르르 같은 시간에 나갔다. 오전 내내 주문이 쉴 새 없이 밀려왔다. 초반에 카푸치노와 카페라테를 구분 못하는 소년들과 함께 잘못된 커피 주문으로 웃기도 하였고, 몇십 잔의 커피 주문이 밀려 진땀을 흘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커피 주문이 없어 '이 시골 마을에서 무슨 커피람' 하고 푸념했던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자라고 일을 해왔던 내게, 인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일을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였다. 특히 달라이 라마의 티칭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나를 포함한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소년들은 아침 장사를 마치고 밤 12시가 되어야 그 다음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서로 몸을 부대끼며 일을 하니 서로 많이 다투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서로 가까워지기도 하였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설거지를 쉬지 않고 해야 하는 소년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음식 주문에 소리에 소리를 지르며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주방 친구들, 그리고 발품에 발품을 팔며 음식을 날랐던 소년들, 특히 내 커피 주문까지 받아야 했지만 그들의 얼굴엔 항상 웃음이 있었다. 이것이 인도인이 가지고 있는 큰 힘인 것 같다. 


그들은 나에게 항상 말했다. '노 프라블럼. 우린 인도인이야'


그리고 그들은 타지에서 온 나도 그들과 똑같이 일을 했다는 것에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우리는 모두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함께 일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한 일은 그들이 움직인 그 시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곳에서 그렇게 겨울 장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와 '쉼'의 시간을 홀로 보내고 있는 지금, 이런 생각이 든다. 첫 시작의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한 계절을 우리가 원하는 꿈으로 시간을 보냈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시절 우리는 만났고, 함께 꿈을 꾸었고, 그리고 그것을 실험하는 한 계절을 보냈고, 그리고 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다시 함께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주문이 들어와 만든 초코 녹차 비건 케이크



이전 08화 모하메드의 부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