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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백 Nov 02. 2022

약달력

한때는 곳간 열쇠 쥐고 마을을 호령했던 천석꾼 맏며느리

오늘도 폐박스 맛집 한 곳을 까먹었다     


약월 약일 약요일이 오면 약 먹는 기계가 작동한다 

식후 삼십 분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몇몇 얼굴 

간혹 오작동을 일으켜 약을 라면에 넣어 끓이기도 했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만능손   

철이네 송아지도 받아 내고 순자네 경운기도 살려 내더니만   

걸핏하면 밥상을 들어 엎고 노름판에 들락거리고 자식들을 후려 팼다   

저걸 죽여 말아 하다가도 부둥켜안고 살았는데  

환갑을 막 지낸 겨울 아침, 뇌로 가는 울화통이 터졌다  

만능손이 유일하게 잘한 일은 명절날에 간 것      


가난쯤이야 우습지 외로움에 비하면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는 허름한 기억의 날들 

약달력은 달력보다 시계에 가까워서 달이 바뀌어도 넘길 필요가 없고 

빨간 날이 없고 음력이 없다     


문패 없는 반지하방   

엎어 놓은 고무 대야처럼 웅크린 생은 늘 목이 마렵다

천장에 닿은 폐지 더미, 비키니 옷장에 가득 찬 태종이 태식이 태민이 

엎질러진 요강 옆에는 강제퇴거명령 독촉장  

주렁주렁 약주머니 어디쯤엔 ‘기일’이라고 적힌 오만 원 한 장 


날개는 하얀 나라로 돌아가려고 

사부작사부작 흐린 기지개를 켜는데 

약기운으로 오직 약기운으로      


할멈은 마침내 단골 행성 하나를 통째로 까먹었다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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