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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백 Nov 02. 2022

주소들

테이프를 뜯을 때마다 허수씨는 박스의 울음을 들었다

어린이 손이 닿는 곳에 놓거나 보관하지 말 것

농약을 마시는 농부의 안쪽처럼 박스는 절박했다    

쓸모가 사라지면 깊이는 지워지고 ‘폐’라는 접두어가 나붙었다

응애나 벼멸구만큼 미웠을까


주소는 주소다워야 한다는 문어체에 반기를 드는 구어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부의 반듯함을 닮은 운송장이 일당을 결정하는 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갈등은 용서되지 않았다

박스는 알고 있지만, 박스는 안에 든 것과 관계없는 사이     


최초의 주소에는 누가 살았을까

허수씨는 최후의 주소가 되고 싶었지만

첫눈을 기다려온 누구도 끝눈은 기억하지 않듯 끝눈도 끝인지 아닌지 몰랐다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인간을 사냥하는 외계인처럼 박스 안의 것들은 예상과 달랐다 허전함들이 튀어나왔다 가끔은 까도 까도 뒤끝만 나왔다        


밀봉구역을 갖는다는 것은 고립 아니면 독립

허수씨를 따라다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하품의 도돌이표       


허공에 붙들려 두리번거리는 가려움의 날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근육을 소비하기엔 캐치볼만한 게 없다 이빨 사이에 낀 찌꺼기처럼 내팽겨지는 취급주의들

그래서 집하장은 야구나 축구가 되고, 그냥 되고, 무대기를 대하는 까데기는 패대기로 종결되었다         


허수씨는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소?

주소 하나 얻으려고요

그렇지, 여긴 널린 게 주소지만 쓸 만한 주소는 드물지      


잠깐 모였다 이내 비슷한 수준끼리 옆구리를 나눠 갖는 동선의 끄나풀들

멀리 나갔다 돌아오던 번지수는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널뛰며 첫사랑의 안부를 묻곤 했다

골판지는 마찰계수라는 반려의 조건으로 스티로폼과 벗트고 반나절 외출을 위해 태어난 대립각은 빈틈에 뽁뽁이가 개입하면서 삼각 구도를 이루었다 삼각은 모서리로 기능했다     


어긋난 주소는 제 역할이 끝나도 박스를 떠나지 못했다

일부러 틀리게 적은 속옷 사이즈처럼 당당한 잘못이었다


주소는 세금을 거두기 위한 계획이었다   

바코드를 발명한 몽상가들이 새벽을 찢는 거리에서

지름길은 촘촘한 눈발처럼 춤을 추었다

주소가 애매할수록 뚜렷해지는 허수씨는 하루에 한 번 빈 박스를 받았다

그 안에 주소가 있든 없든       


배송금지품목이라는 스티커 아래 흠뻑 젖은

추적도 조회도 안 되는 아날로그 동물처럼 입도 없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번지르르한 수도꼭지의 테두리      


업소에서 돌아온 여인이 녹아내린 공백을 부둥켜안았을 때  

시차란 보냉제의 안간힘을 시험하는 일

커터칼에 검지가 잘려나간 그날도 허수씨는 휘파람을 불었다

박스를 풀기 위해 밥을 먹는 사람은 박스를 나르기 위해 밥을 먹는 사람의 젖은 발자국과 휜 등줄기를 몰랐다      


저기요, 제일 이상한 주소 좀 주실래요 이를테면 젤리 같은

그냥 주소 말이에요

반품 같은 거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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