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존재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몸이 허약했고,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런 나에게 아빠는 엄하시면서도 자상한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술을 좋아하셔서 때때로 엄마와 우리 삼 남매를 힘들게 하신 적도 있었지만, 정 많고 눈물 많은 따뜻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성격이 예민하고 불같아 가족들이 마음 고생한 날도 있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떠오르는 건 결국 아빠가 우리에게 해주셨던 따뜻한 기억들뿐이다.
그 시절 나는 이유 없이 열이 자주 났고, 열경기를 앓았다.
결혼하고 아이 둘을 키우고 보니, 그 당시 30대 초반이던 젊은 아빠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지 짐작이 간다.
인터넷도, 의학 정보도 없던 그 시절에 고열과 발작으로 의식을 잃는 어린 딸을 안고 병원을 찾던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빠는 나를 데리고 성남에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까지 오갔다.
머리에 하얀 크림 같은 액체를 바르고, 주렁주렁 선을 연결해 뇌파검사를 받던 기억이 남아 있다.
휠체어에 앉아 링거를 꽂은 채 병원 로비를 돌던 장면도 어렴풋하다.
삼 남매를 키우며 먹고살기도 힘들었을 그 시절, 차도 없이 성남에서 서울까지 몇 번씩 버스를 갈아타고, 내 손을 꼭 잡고 다니던 아빠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버스에서 자리가 나면 아빠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등을 토닥이며 재워주었다.
자리가 없을 땐 모르는 아주머니 무릎에 앉혀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게 싫다고 울다 결국 혼나고 앉았던 기억도 있다.
아빠는 치료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는지 전국에 좋다는 한의원, 심지어 무당까지 찾아다녔다.
어느 날은 어느 용하다는 무당집에 날 데려가셨는데, 향 냄새와 낯선 분위기가 무서웠다.
무당은 나를 보더니 스무 살까지만 살 거라고 했고, 어느 깊은 산속에서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며 굿을 했다.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어린 나는 그 광경이 공포였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무당 방울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러고도 아빠는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온갖 약재와 민간요법을 찾아 전국을 다니셨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누에고치 가루가 좋다는 말을 듣고 어딘지도 모를 어느 시골 마을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날 아빠는 내가 비 맞고 또 아플까 봐 파란 비닐 우비로 나를 똘똘 말아 눈만 빼꼼 나오게 해 주셨다.
그렇게도 나를 살리겠다고 애쓰셨던 아빠가 2023년 12월, 78세의 나이로 요양병원에서 조용히 홀로 눈을 감으셨다.
엄마처럼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셨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아빠가 나만큼 끔찍이 아꼈던 아빠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고모가 해준 말은 충격이었다.
아빠는 그 옛날 나를 살리려고 호랑이 뼈를 구해서 갈아 먹였고, 심지어 사람 뼈까지 구해 먹였다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아빠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라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믿어졌다.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이 아프거나 사고가 있었을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곁에서 울며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슈퍼맨 같은 나의 아빠는 온 세상을 발로 뛰며 나를 살릴 방법을 찾아다녔다.
그 절박한 마음과 사랑은,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이렇게 유별나고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런데 정작 아빠가 병상에 누워 힘들어하실 때, 나는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그 사실이 평생 한으로 남아 나를 괴롭힌다.
아빠의 사랑은 내 삶의 근간이 되었는데, 나는 그 빚을 끝내 갚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꾸 나를 작아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