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혼자 떠나보내야 했던 이유
엄마는 힘든 투병 생활을 마치고, 2022년 9월 19일. 자신의 칠순 생일날 하늘의 별이 되었다.
70번째 생일상은 차려드리지 못한 채, 엄마는 그날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는 엄마의 부재를 실감할 겨를도 없이 장례를 치르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 무렵, 아빠는 요양원에 계셨다. 치매가 깊어져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기 어려웠던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고요하지만 쓸쓸한 생활을 이어가고 계셨다.
엄마가 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
오십 년 가까이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아내가 떠났는데, 그 사실을 전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요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가 코로나에 확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면회는 전면 금지되어 있었고, 아빠의 건강 상태가 예전보다 불안정하다는 연락이 수시로 이어졌다. 열이 났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기운이 없어 식사도 잘 못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나는 아빠 곁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그저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소식을 붙잡고,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맞은 엄마의 삼오재 날, 9월 23일 금요일. 삼 남매가 함께 엄마의 봉안당으로 향하려던 아침, 요양원에서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님 혈압과 의식이 급격히 떨어져 응급실로 이송 중입니다.”
그 순간, 핏기가 확 가시며 손발 끝이 얼어붙는 듯했다.
엄마를 잃은 지 고작 나흘, 이제는 아빠마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들어야 한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엄마의 봉안당으로 가던 차의 방향을 틀어 김포 뉴고려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엄마의 삼오재를 지내러 가야 하는데... 아빠를 먼저 봐야 할까...’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마음은 이미 하나였다. 엄마를 향한 길보다 아빠가 있는 응급실이 더 간절했다.
응급실 침대 위에 누워 계신 아빠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단 두 달 남짓한 요양원 생활 동안, 아빠는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눈빛은 흐려져 있었고,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슬픔이 밀려왔다. ‘이렇게 쇠약해지신 걸, 그동안 곁에서 보지 못했구나. 엄마 돌아가신 슬픔에 빠져 있는 사이 아빠는 더 멀리 가고 있었구나...’
그 순간 또 하나의 고민이 나를 짓눌렀다. ‘아빠에게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까?’
평생의 반려자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으실까 두려웠다. 이미 기력이 바닥난 아빠가 그 소식을 감당할 수 있을까. 수없이 망설이다가, 결국 나는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평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자식 된 마음의 비겁한 변명 같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응급실에서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패혈성 쇼크. 이어서 심정지.
모니터에 경고음이 울리고, 의료진이 분주히 움직였다. 내 눈앞에서 아빠의 몸이 경련처럼 흔들릴 때,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절망이 덮쳐왔다.
엄마의 삼오재 날, 아빠는 그렇게 생사의 기로에 서 계셨다.
사람들이 ‘줄초상’이라 부르는 비극적인 상황을 두려움 섞인 말로 전하곤 했는데, 그 일이 우리 가족에게 닥쳐오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나를 무너뜨렸다.
그날, 나는 기도하듯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엄마, 아빠를 제발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아직은 아니에요. 저희가 감당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