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티 캐슬(Rabati castle)을 방문하다.
눈이 일찍 떠진 아침, 숙소 발코니로 나가 보르조미의 새벽 풍경을 맞이한다.
새벽까지 켜져 있는 가로등이 보르조미 마을의 운치를 더하고, 마을을 양쪽으로 나눈 쿠라강은 품위 있게 조용히 흐르고 있다.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을이다.
주방에 가니 정갈한 조지아의 가정식 아침식사가 식탁에 차려져 있다. 어쩜 이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하셨을까!
죽처럼 보이는 닭고기가 들어있는 걸쭉한 음식, 직접 만든 요구르트, 야채 절임 등 이름 모를 낯선 조지아의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처음 보는 낯선 음식만큼 맛도 독특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들이라 덥석 먹기에 약간 주저함이 있었지만 이것저것 섞어 먹으니 먹을 만했다.
가정에서 직접 만든 자연식들이 내 입에 딱 맞는 부드러운 음식은 아니었지만 한눈에 보아도 건강에 좋은 음식들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조지아에 장수마을이 있는 게 당연하다. ㅎㅎ
정성이 깃든 건강한 아침 식사를 끝내고 아쉽지만 우리는 바로 떠나야 했다.
친절을 베푸신 할아버지께 한국에서 가져온 전통 기념품(부채와 거울)을 드렸더니 매우 행복해하시며 우리에게도 포도주 한 병과 독특한 선물을 주신다.
여행을 무사히 마치길 바라고 행운을 기원한다며 귀한 원석 두 개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 자그마한 돌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할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신 친절과 따뜻한 마음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어제 할아버지께서 꼭 들렀다 가라던 아할치헤를 가기 위해 우리가 가려던 목적지와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보르조미에서 약 1시간 정도 운전을 하니 '아할치헤'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지도에선 18km만 더 가면 터키(Turkey)를 만난다고 표시되어 있다.
이정표를 만나고 얼마쯤 지났을까.
먼 곳에서 보아도 규모가 우람한 라바티 캐슬(Rabati castle)이 보인다.
성(城) 전체가 다른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걸 보니 아할치헤가 과거에 화려하고 번창했었던 마을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할치헤'는 과거에 '사자'라는 의미를 지닌 롬시아(Lomsia)로 불렸던 마을이며, 아할치헤의 뜻은 '새로운 요새'라는 의미이다.
'아할치헤'의 마을 이름은 12~13세기에 살았던 삼프헤 공작들의 이름인 '아할치헬리'에서 비롯된 이름인 듯도 하고 또 한편으론 롬시아 마을에 12세기경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면서 문자 그대로 '새로운 요새'라는 아할치헤(Akhaltsikhe)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내용도 있으니 무엇에서 유래되었는지 정확한 사실은 밝혀진 게 없는 듯하다.
이 도시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몽골, 터키인들의 침략을 받았는데 이 중 1500년대 후반부터 이 지방을 통치한 오스만 제국의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조지아 정부가 라바티 캐슬을 복원할 때 마을 주민들도 기부금을 내는 등 이 성에 대해 많은 애착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어젯밤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주민들은 라바티 성에 많은 정성을 보태면서 과거의 화려했던 아할치헤 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라바티 캐슬의 멋진 위용은 아할치헤 마을의 자존심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Akhaltsikhe 마을에 있는 이 성은 9세기에 지어졌을 당시에는 '롬시아 캐슬(Lomsia Castle)'로 불렸다가 후에 '라바티 캐슬(Rabath castle(Rabati castle))'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라바티는 기원이 아랍어이며 '요새화 된 장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성은 전쟁 중에는 주민들이 대피했던 성이기도 하다.
조지아의 수도가 아니었는데도 규모가 우람한 성채가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이 지역의 귀족은 막강한 세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부가 재건축을 하면서 새롭게 다시 지은 건축물들이 많다 보니 과거의 생생한 흔적을 제대로 느끼기엔 한계가 있어 다소 아쉬운 마음도 생긴다.
과거에 존재했던 성과 요새로서의 기능을 보존하기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편리성과 세련된 조형물과 전경에 더 치중을 두고 복원된 느낌이 들어 새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성城 방문시간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방문객들은 거의 없었고 넓은 성터에는 잘 다듬어진 정원과 요새들, 망루와 모스크 등이 여기저기서 진지하게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요새의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본다. 하지만 이 요새도 허물어진 곳 없이 말끔히 복원되어 있어 마치 특별히 새로 지어 놓은 듯한 생각도 든다.
요새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성 내부의 전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넓디넓은 땅에 아름답고 독특한 건축물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어 과연 과거에도 이렇게 많은 구조물들이 존재했었나 싶다.
말쑥하게 다듬어진 정원의 모습과 갓 지어진 듯한 깔끔한 건물의 모습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옛 흔적이 사라진 인상에 적잖이 안타까움도 들었다.
하지만 조지아 인들이 이 성을 보존하려고 했던 노력과 자취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라바티 성은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져 있었고 성벽 안에는 눈에 띄는 황금색 지붕 모스크가 있다.
성 내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보니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스크는 차가운 석조로 된 바닥이 반질대고 있었고 모스크 앞의 연못은 깨끗하고 정갈한 운치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곳의 풍경은 자연의 美라고 하기보다는 왠지 인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망루에 오르니 멀리 있는 마을 교회가 보인다.
아할치헤는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한 곳에 존재하는 마을일까? 아니면 이 모스크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던 당시의 이슬람 사원을 단순히 복원해 놓았을 뿐일까?
문득 몇 년 전 방문했던 모스타르 마을에서의 독특한 경험이 떠오른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마을이 이슬람 지역과 가톨릭교 지역으로 나뉘어있어 정오가 되면 이슬람 경전과 성당 종소리를 동시에 들려온 적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터키가 바로 옆인 아할치헤는 두 종교(이슬람교와 조지아 정교)가 함께 존재하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쿠라강의 지류인 포츠코비강은 도시를 가로지르며 아할치헤의 고고한 전통과 험난한 역사를 품은 채 숨 쉬듯 흐르고 있다.
멀고 낯선 곳에서 유랑하는 우리의 여정도 쿠라강과 함께 시작했고 그리고 이 강과 함께 끝날 것이다.
쿠라강은 우리의 여정을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