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학년 교사의 시간 일교시
학교별로 시간대는 다르지만 초등학교에서 주어지는 점심시간은 보통 한 시간이다. 8살은 그 한 시간 동안 치열하게 화장실에 가서 줄을 서고 (그 와중에 쎄쎄쎄를 하고), 손을 씻고 (그 와중에 비누거품으로 장난을 치고), 체온을 재며 (그 와중에 온도 경쟁으로 투닥거리고), 줄을 서면 50분 정도가 남는다.
자, 이제 50분 남았으니 급식실에 도착하면? 한 시간 동안 밥을 먹는다!...(?)
시간 계산법이 이상한 것 같지만 일학년의 시계는 이렇게 흘러간다. 젓가락질로 고군분투 하는 아이, 편식이 심해 밥알을 세고 있는 아이, 입속에서 무한 생성되는 밥알을 주체못하는 아이 등 아이들은 각양각색의 이유로 점심시간을 초과해서 밥을 먹는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수업에 늦어도 개의치 않는다. 왜냐고? 우리 반에 걸려있는 아날로그시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마지막 식판을 검사하고 손에 대롱대롱 매달듯 달려 나오며 아이를 화장실로 보낸다. 그사이 나는 재빨리 5교시 수업 거리를 준비하고.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면 3월은 보통 교사는 이 닦을 틈도 없이 5교시가 시작된다. 1학년도 5교시를 하나요? 종종 받는 질문이지만 놀랍게도 일주일에 3회 이상은 운영을 해야 정규 수업시수를 빠듯하게 소화할 수 있다. (학교에 따라 3월 한 달 입학 초기 적응활동 기간에는 오전 수업만 운영하는 학교도 있다.)
그날도 학기초의 그런 날이었다. 빠듯하게 점심을 먹고 난 뒤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나른한 오후. 창가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아이들은 일광욕하는 고양이들 마냥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 명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자 도미노 넘어가듯 너도 나도 하품을 했다.
“여러분~ 졸려요?”
물어 뭐하랴. 꿈뻑꿈뻑 눈을 비비며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중 한명이 물었다.
“선생님, 학교는 낮잠 왜 안자요?”
아직 유치원(혹은 어린이집)에서 낮잠 자던 티를 채 못 벗은 질문.
“학교는 원래 낮잠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요?”
이그. 궁색한 대답이다. 원래라는 게 어딨나. 이 세상에 원래라는 건 원래부터 없다.
“선생님, 졸려요.”
졸리워하는 아이들 데리고 10분 더 공부한다고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랴. 그래, 못나간 진도는 내일 좀 더 나가지 뭐.
“얘들아, 그럼 우리 딱 10분만 자고 청소하고 갈까요?”
“네!!”
“안 자는 사람 있으면 다시 공부할 거예요~!”
마음에도 없는 엄포를 놓으며 아이들을 바라봤다. 자리를 돌아다니며 잘 자나 둘러보는데 한 아이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선생님, 자장가 불러주세요.”
“자장가?”
끄덕끄덕-
아이도 없는 나에게 자장가만큼 낯선 게 또 있겠느냐마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곡 하나.‘엄마가 섬그늘에’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그때였다.
한 명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잔뜩 찌푸린 미간, 벌렁벌렁 넓어진 코평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방울이 가득 맺혔다. 이내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중저음의 굵직한 울음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울음소리 + 엄마’라는 자극은 도화선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 교실을 울음 폭탄으로 만들었다. 스타카토처럼 한 음절 한 음절 엄마를 부르며 어깨춤을 추는 녀석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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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 얘들아.... 너희 엄마 죽은 거 아니야... 그냥.. 선생님이 노래 부.. 른 건데...’
이렇게 깨우려던 건 아닌데... 공포의 ‘엄마가 섬그늘에’때문에 꿀 같은 5교시의 10분은 진땀 나는 10분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뒤로 다시는 아이들에게‘엄마가 섬그늘에’를 들려주지 않는다.
절. 대.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