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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년하루 Sep 30. 2024

붉은여우

2부-8화. 동네 경찰 ▶ 붉은여우

누런 살쾡이는 두릅나무 아래서 산제사를 거행다. 심마니는 산에 들기 전, 안방이나 장독대에서 무탈한 산행과 삼령 높은 채삼을 기원하며 고사를 지낸다. 살쾡이는 산제를 위해 보관하고 있던 제수품을 두릅나무 아래 마련하고, 습속 방식으로 산제를 진행한다.


산신 제물로 백 년 묵은 산삼 두 채와 돼지고기, 북어, 과일, 과자를 올린다. 돼지머리를 제수해 정성을 보여야 하나 급하게 진수하느라 얼마 전, 면에서 보내 준 돼지고기 덩어리를 물에 끓여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얇게 베어 올린다. 술은 마을 주정에서 빚은 신선계곡 막걸리를 작은 항아리에 가득 채워 놓는다. 지붕 밖에서 거행하는 산제라 퇴주 그릇을 제반에 받쳐 놓지 않고 퇴주는 땅에 부어 젖신다.


양쪽에 촛불을 켜고 향을 태우고 신령에게 술을 올린 뒤, 퇴주하고 절을 올려 산제사를 시작한다. 제물로 올린 백 년 묵은 산삼은 두릅나뭇과 다년생 초본 식물로 산 정상 아래, 골짜기 상부에 한기가 느껴지는 반양반음에 위치한 자리에서 만났다.


산제를 지내는 장소에 두릅나무는 산삼과 같은 두릅나뭇과에 속하며, 낙엽 활엽 관목으로 높이는 5미터 정도이고 줄기에는 가시가 있다. 산기슭 양지바른 계곡이나 숲가에 자리를 튼다. 두릅나무 군락지를 지나 산에 오르다 보면 큰 바위 위쪽과 좌우측면, 큰 나무 밑과 옆과 같이 햇볕을 가려주는 장소에서 삼을 만날 수 있다.


누런 살쾡이는 두릅나무와 산삼이 같은 두릅나뭇과에 속하고, 산제를 지내는 땅기운과 제물로 올린 산삼의 영험한 기운이 성스럽게 완성되어 심마니가 올린 소지가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는다.


“신령님 거처를 모독하고 더럽힌 두 잡귀 기운을 백 년 묵은 산삼과 제수합니다."


"두 잡귀의 연령을 이 삼에 불어넣어 인명을 거두어 주시길 바라고 바라옵니다."


"신령님 두 잡귀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누런 살쾡이는 제를 올리면서 세 번 술을 올리고 두릅나무 아래 두 번 술을 붓는다. 축문과 소지를 마치고 신령께 올린 축원을 태우고 촛불을 끈다. 제의가 끝나고 제상에 남아 있던 술과 안주를 음복한다. 술이 목을 타고 서서히 내장을 젖시자 정신이 바짝 든다. 알코올 중독 살쾡이는 항아리에 남아 있던 술을 두 손으로 잡아들고선 안주는 입에도 대지 않고 술만 벌컥벌컥 들이켠다.


산제가 끝나면 제물을 그대로 두고 산에서 내려갔다가 다음 날 아침 다시 산에 올라 제물을 챙겨 마을 사람들에게 분배해야 하지만, 살쾡이가 지낸 산제는 신령께 두 사람의 생명을 거둬달라는 고약한 기운을 담아 올린 소원이라 동네 사람들과 제물을 나눌 수 없다.


산제를 마치고 잠이 든 살쾡이는 술기운이 빠지자 썩은 발에서 악취가 올라온다. 신선계곡에 발을 담가 기운을 식히려고 한다. 새벽에 여우와 검은 나시가 119 구급차를 타고 떠난 뒤에도 모래톱 위에 텐트가 그대로 설치되어 있어 그들이 아직도 철수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주변에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웅성웅성한다.


"엊저녁에 남자와 여자가 계곡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데"


"새벽에 119구급차가 와서 여자를 싣고 갔다고 하던데"


다리 위에서 주민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자, 순찰을 돌던 동네 경찰이 경찰차를 도로변에 주차한다. 모여 있던 주민들에게 다가오면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다. 다리 위에서 담배를 피우며 쪼그려 앉아 있던 노인이 새벽에 구급차 사이렌 우는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았는데, 어떤 여자가 입 호스를 문 채 들것에 실려 구급차를 타고 갔다고 한다.


"새벽에 영감이 장례식장 갔다가 응급실에서 여자를 봤는데, 얼굴과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다급하게 여자를 옮겼다고 하는데, 죽지는 않았다고 그러데"

   

동네 경찰은 119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새벽에 신선계곡에 출동한 구급차가 있었는지 묻는다. 동네 종합 병원 응급실로 환자 이송을 확인한다. 병원 응급실에서는 새벽에 응급 입원한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심폐소생술로 심장이 반응하여 기계식 강제 호흡을 하였는데 30분 전부터 생체 반응이 미약한 상태라고 한다.


"여우가 죽지 않았어"


누런 살쾡이는 빨간색 뚜껑으로 잠겨진 소주 두 병을 챙겨 산에 오른다. 새벽에 산제를 지낸 두릅나무 아래서 양쪽 촛불과 향을 다시 피운 뒤, 새벽에 진행했던 방식으로 산제를 다시 올린다. 한번 올린 제사상을 두 번 치르면 신령이 노한다는 습속을 알고 있지만, 살쾡이는 이를 마다하지 않고 산제를 다시 지낸다.


제를 마치고 새벽에 올린 수육을 두 점 먹고, 소주 병째 들고선 목구멍으로 쉼 없이 넘긴다. 하늘을 바라보고 지난 일을 기억하며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술병을 입에 갖다 대고 들이붓는다.


"죽어야 끝나는데"


"모두 죽어야 끝나는데"


술에 취하고 피로가 쌓인 살쾡이는 두릅나무 밑에서 널브러져 고개를 숙인 채 두발을 벌리고 힘없이 쓰러진다. 꿈에서 붉은여우가 나타나더니 죗값은 치러야 된다며, 피를 흘리는 눈으로 살쾡이 가슴에 기다랗게 늘린 손톱을 찌른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깼지만, 너무 생생한 꿈에 몸이 떨리면서 힘이 쭉 빠져 후들거린다.


두릅나무 옆 소나무 숲에서 바스락 거리며 컥컥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고사리 숲에서 검은 멧돼지 무리가 킁킁거리며 붉은 눈으로 살쾡이를 노려보면서 앞 발을 들어 바닥을 파헤치고 앞으로 돌진한다. 누런 살쾡이는 제상을 엎어 멧돼지 머리가 자신에게 부딪히지 않게 상을 방패로 삼는다.


상이 엎어지고 음식물이 주변에 흩어지자, 성난 멧돼지는 앞발을 들어 머리로 제상을 박아 버린다. 멧돼지가 머리로 상을 박으며 제상은 구멍이 뚫리고, 상다리가 부서지면서 살쾡이 가슴을 찌른다. 멧돼지 머리가 상에 박혀 떨어지지 않자, 멧돼지가 미친 듯 두릅나무에 머리를 갖다 대고선 목을 빼려고 발버둥 친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신령님이 노한게 분명하구나"


저 뒤에서 다른 멧돼지가 살쾡이를 향해 달려온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 살쾡이 머릿속에서 여우와 함께 했던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휩쓸고 지나간다.

 

"여보, 미안해"


여우가 기억 저편에서 살쾡이에게 잘못을 빌며 속죄한 후, 저 멀리 떠나간다. 깜박 기절한 동안에 살쾡이 옆구리를 멧돼지가 머리로 들어 올려 몸이 붕 하고 떴다가 아래로 떨어진다. 또다시 멧돼지가 머리를 부딪히며 올리려고 할 때 붉은여우가 풀숲에서 나타난다.


붉은여우가 나타나자 멧돼지가 뒤로 물러서면서 뒷발질을 하며 달려들려고 한다. 붉은여우가 멧돼지 무리에 있던 새끼 곁으로 다가서자, 어미 멧돼지가 새끼를 안으로 몰아넣고는 주변을 둥글게 감싼다. 얼마 전 천년고찰 백구 동자에게 물려 죽임을 당한 멧돼지 새끼의 가족이다.


동네 경찰이 죽은 멧돼지 새끼를 두릅나무 밑에 묻어 놓아, 멧돼지 가족들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던 것이다. 이제야 그 사실을 눈치챈 살쾡이는 몸을 굴려 산기슭 아래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산아래로 굴러 떨어진 살쾡이는 밤이 되어서야 산아래 불빛이 보이는 장소를 찾는다.


"이제 살았어"


살았다는 안도감에 힘이 빠진 살쾡이는 다리를 쭉 펴고 도로 옆에 앉는다. 엊저녁부터 오늘 밤까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살쾡이는 스르륵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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