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꽃무릇을 만나다

선운사 꽃무릇의 풍경을 보고

by 우산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 검단 선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진흥왕이 왕위를 내려놓고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진흥왕이 머물렀던 곳임은 확실합니다.

나에게는 송창식 씨의 노래 덕분에 귀에 익어 어느 해 너무 일찍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 반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에게는 사계절 그리움을 갖고 찾아가는 곳일 것 같습니다.

9월이 되고 아침 날씨가 선선해지며 올해가 가기 전에 붉은 꽃무릇을 실컷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봄에 피는 붉은 꽃은 많은데 가을에는 자주색이나 보라색 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꽃을 보는 것도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해는 활짝 피었지만 생기를 잃고 서 있는 꽃무릇을 빗속에서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석산(石蒜:돌마늘), 꽃무릇은 뜨거운 여름 태양의 열기를 온몸에 받고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초록색 꽃대 끝에서 한 해가 가기 전에 그리움과 열정을 가득 담아 9월경에 꽃술까지 붉게 피어납니다.

그리고 그 꽃이 만개한 풍경은 9월 말경이 절정인 것 같습니다.

올해는 꼭 그 꽃의 진면목을 반드시 보리라는 마음으로 산행 동료들과 새벽길을 나섰습니다.

창밖을 보니 구름 깔린 여명의 하늘빛이 깊은 사색을 담은 듯 구름과 주홍빛이 어우러져 아름다웠습니다. 평택을 지날 무렵 짙은 주홍색 빛이 동그란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그 해는 우리가 가는 새벽길에 동행하며 점점 더 높이 떠올랐습니다. 일행 중 여러 명이 그 빛깔과 모양을 보고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9시가 좀 넘어 도착하여 도솔산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니 몇 걸음 안 가서 붉은색 꽃무릇이 다홍색 한복 치마같이 가득하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입구의 카페 근처는 꽃이 가지런하고 빽빽하여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절의 대웅전 만세루를 돌아보며 뒤편으로 갔습니다.

커다란 동백 숲 앞에 꽃무릇이 활짝 피어있습니다. 연녹색 줄기 위에 긴 속눈썹을 말아 올린 다홍색 꽃잎이 단정하면서도 세련돼 보입니다.

꽃무릇은 분명 도시적인 분위기인데 깊고 깊은 산속에서 단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어쩌면 깔끔하고 단정함을 좋아하여 번잡한 곳을 피해 사는 것일까요?

뿌리와 줄기에 방충, 방부 작용이 있어서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칠할 때 섞어서 쓰기도 했다니 그 쓰임새 때문에 절 근처에 많이 심어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 깊고 깊은 산중 절 근처에서 많이 피었겠지요. 덕분에 우리는 고즈넉한 절에 가서 화려한 석산을 보게 되었네요.

선운사 뒷산의 풍경을 보니 문득 동백과 석산이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동백꽃이 붉게 필 때 석산은 그 앞에서 연녹색의 잎으로 꽃을 돋보이게 하고 석산이 필 무렵에는 동백은 꽃을 다 떨구고 석산 붉은 꽃물결 뒤에서 녹색 잎으로 꽃의 배경이 됩니다. 서로가 상대를 존중하고 양보하며 더불어 사는 모습, 우리 사람들도 그렇게 산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자연의 질서는 이런 깨달음을 줍니다.

선운천과 도솔계곡 물소리 들으며 사뿐사뿐 걷는 동안 마음은 가뿐가뿐해집니다. 꽃무릇 군락을 보는 것도 좋지만 드문드문 물가에 몇 송이 핀 꽃도 좋습니다.

도솔암 근처 담장가에 드문드문 핀 꽃도 운치를 더해줍니다.

빽빽하고 가지런하게 핀 꽃은 도시에 모여서 사는 사람 같고, 개울가나 산속에서 드문드문 핀 꽃은 자연의 낭만을 즐기는 낭만 예술가 같습니다.

감동을 더한 것은 도솔암 근처 카페 안 테이블 위에 놓인 꽃이었습니다. 다소곳이 두세 송이 담긴 꽃은 마치 연예인을 가까이에서 보는 듯했습니다.

더욱 감동인 것은 카페 창밖에 핀 꽃무릇이었습니다. 나무 창틀 밖으로 액자처럼 펼쳐진 꽃은 자연인데 정물화에 담긴 정적인 풍경이면서도 새롭고 싱그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꽃무릇이 펼쳐진 다양한 풍경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만난 시절인연에 감사했습니다.

꽃은 절로 피지만 이 또한 세상의 이치를 따른 것이고 이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곱고 멋진 풍경을 마음에 담고 곧 겸손하게 사라지는 자연의 이치도 있지 말아야겠지요.

#선운사#꽃무릇#석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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