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소꿉친구가 재작년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왔습니다. 몇 천 세대가 넘는 대단지인데 어떻게 중앙공원을 사이에 두고 앞 집, 뒷 집 이웃이 되었네요. 마침 친구의 직장과 저의 직장이 같은 방향이어서 한동한 제 차로 같이 출근하였습니다.
그동안 가끔 안부 전화만 하고 살았는데 아침마다 같이 출근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막히는 출근길이 짧게 느껴지더라고요.
작년부터 저의 직장이 다른 방향이 되고는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친구는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며, 주말에는 남편이 하는 음식점에서 일을 돕네요. 휴일에 한나절 가서 일을 돕고는 돌아와 남편 식사를 정성껏 준비한답니다.
평일에는 아침 식사는 물론이고 남편이 먹을 도시락까지 싸는 친구에게 열녀라고 불렀지만 쉬는 시간이 없는 친구가 걱정이 됩니다.
저도 직장을 다니며 나름 가족들 식사 신경 쓴다고 했는데 이 친구의 가족에 대한 정성을 보니 저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는 말이 나오네요.
가끔 추어탕이나 설렁탕을 저녁으로 사가며 친구 것을 하나 더 사서 아직 퇴근 못한 친구네 집 관리실에 맡겨 놓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차로 다니니 물건을 사들고 다니기 편하지만 대중교통으로 다니며 늦게 퇴근하는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홈쇼핑에서 갈비탕을 한 상자 사서 전하네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 이럴 때 쓰나 봅니다.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친구가 이렇게 안팎으로 바쁘다 보니 앞뒷집 살면서도 자주 보지 못합니다.
이 친구 어찌나 바쁘게 사는지 수원에 산지 50년이 넘었는데 서호 공원도 지난가을 저랑 간 것이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갈대가 우거진 속에 머리를 날리는 사진 속의 친구는 제 기억 속의 초등학생과 비교해도 얼굴과 표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세월이 친구의 착한 마음을 보고 비껴갔다고 할 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순수하고 착한 얼굴이 그대로입니다.
저를 만나지는 못해도 오며 가며 저희 집 주방에 불이 켜 있는 것을 보면 이 친구도 아직 살림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바라보면 정겹다고 하네요.
요즘 공원에 운동하러 가면 초록색 명자꽃 잎, 회양목, 철쭉 잎 사이로 자라나 온 분홍색 메꽃이 자주 보입니다. 나팔꽃과 비슷한 이 꽃을 볼 때마다 이 친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한 연분홍 꽃잎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메꽃은 과묵하지는 않고 조용하며 이목구비가 작고 섬세한 친구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정겹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자기가 필 시간에 맞추어 환하게 웃는 모습은 책임감 강하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성실하고 따뜻한 친구의 성품입니다.
메꽃의 꽃말은 수줍음이라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드러내거나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는 친구와 메꽃의 꽃말은 잘 어울립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낮에는 꽃잎을 오므리는 나팔꽃과 달리 메꽃은 낮에도 활짝 피어있습니다. 잎의 모양도 나팔꽃과는 좀 다르고, 색도 나팔꽃은 보라, 진한 분홍, 하양 등 다양하지만 메꽃은 분홍색이 대부분이며 흰 메꽃도 있습니다.
뿌리와 줄기가 모두 식용이 가능하며 고구마 맛과 비슷하다고 하며, 혈압과 당을 내리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한때는 구황식물로 배고픈 백성들의 배를 채워 준 고마운 식물입니다.
어린 시절, 이 친구랑 집 근처 밭둑에 핀 나팔꽃을 보러 새벽에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근처 포도밭 울타리에 핀 나팔꽃을 보러 가기도 했지요.
나팔꽃은 아침에 피고 낮에는 꽃잎을 닫아버리니 꽃병에 꽂아 놓는 꽃도 아니고, 요즘 같이 아파트에 살았으면 화단에 꽃이 많으니 꽃을 보러 그 새벽에 나가는 일은 안 했을 것 같네요.
우리가 어렸을 때는 새벽 6시에 학교에 모여 동네 길을 청소하고 도장도 찍어 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꼬맹이들이 새벽잠이 없었나 봐요.
꽃을 보러 가자고 누가 먼저 했는지는 몰라도 참 순진하고 엉뚱한 아이들이었네요.
친구는 참 착하고 고지식한 아이였어요. 제가 말하는 것은 100% 믿고 따랐습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지만, 한동안은 나는 소머즈다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친구도 따라서 뛰어내리고 했던 기억도 있네요.
친구와 저는 상가가 있던 길목에 살았어요. 친구와 저의 부모님은 함께 장사를 하신 적도 있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항상 주변에 공사하는 곳이 있었고 어느 날은 친구가 못에 찔려 걷기 힘든 적도 있었지요,
친구를 도와 함께 등굣길을 오가며 친구의 다친 발이 추울까 봐 쓰레기에 불이 붙어 있는 학교 소각장 앞에서 제가 발을 받쳐주며 불을 쬐라고 했지요. 상처는 시원해야 하는데 어린 마음에 따뜻하게 해 주면 상처가 잘 나을 줄 알고 엉뚱한 짓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네요.
여러 자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친구는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챙기고 나중에 동생들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집안의 기둥처럼 동생들과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내는데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친구는 저보다 두 달 먼저 결혼하고 아기도 두 달 먼저 낳았습니다.
두상이 반듯하고 예쁜 아들이었습니다.
제가 지방에서 올라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일 때, 이 친구가 학원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인 이 친구의 조카와 3학년인 친구의 아들부터 가르치기 시작했지요. 벌써 대학생이 된 그 아이들과 함께 하던 시간이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더하여 힘들지만 행복도 두 배인 시간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에서 외할머니와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친구의 조카와 아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정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친구 아들이 대학에 갈 때 그 아이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키워주었던 저의 공을 친구의 동생들이 인정해 주었다고 하니 가슴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월간으로 나오는 학습지를 하면 보습 학원 수업으로는 끝이었지만 책도 더 읽히고, 동시도 쓰게 하였습니다.
같이 카페에 가거나 밥을 먹지는 못하는 중에도 어느 날 살구나 복숭아 잼을 만들어 건네기도 하고 시모님이 주신 쑥개떡을 주기도 합니다.
잼이라는 것이 시간을 두고 저으며 졸여야 하니,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고, 한 장 한 장 납작하고 둥글게 만든 쑥개떡도 고기나 생선보다 채식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소중한 음식일 텐데, 저에게 나누어 주는 친구의 마음이 무척 고마웠습니다.
갱년기에 접어들며 열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친구가 걱정되어 홈쇼핑에서 산 홍삼을 건네며 몸을 챙기라고 했습니다.
여상을 졸업하고 대학에 가려고 재수를 하던 중 많이 아파 입원도 했던 친구는 어려서부터 고기나 생선을 먹지 않아서 걱정이 더 됩니다.
앞만 보고 옆을 보지 않는 친구는 지금까지 첫 직장에 다니며 잠시 육아를 위해 퇴직을 했었지만 결국 그의 경력과 실력을 아는 직장에서 다시 원래 자리로 복직하게 해 주어 지금은 꽤 책임이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직장 경력이 적을 때는 일을 배우느라 늦게 퇴근하고 경력이 쌓여서는 일 잘 못하는 직원 안쓰러워 가르쳐주느라 퇴근이 늦었다는 친구.
결혼하고 남편이 외국 근무하느라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 함께 산 시간이 짧으니 더 잘해주고 싶다는 친구의 외조는 한결같은 그녀의 사랑과 정성, 고지식함과 순수함입니다.
물론 그 남편 이야기를 들어보면 연애할 때나 지금이나 심성이 그 못지않고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족입니다.
그 둘을 닮은 대학생 아들이 부모님 사랑하고 존경한다며 성실하게 아버지를 돕는 모습에 뿌듯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36도가 넘는 날씨에 친구가 퇴근하자마자 손수 갈아 끓인 따뜻한 콩국을 커다란 페트병에 담아 주네요. 이 더위에 퇴근하자마자 콩국을 만든 친구의 두 볼이 빨갛더군요.
집에 가져와 한잔 따라 마시니 찬 음료만 먹던 속이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니 든든하고 좋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렇게 바쁘게 사는 친구가 금방 끓이고 갈아 만든 따뜻한 콩국물이 36도의 더위에도 따뜻해서 더 좋습니다.
남편에게는 시원하게 식혀서 국수를 삶아 콩국으로 주었지만 저는 친구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 콩국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어머니 시대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음식을 현대에 직장을 다니면서도 식지 않는 가족 사랑의 마음으로 만들고 있는 친구.
반찬 한 끼라도 덜어 주고 싶어 양념육을 전하며 부디 자신의 건강을 챙기라는 당부를 거듭거듭 하였습니다.
어려서 남다른 동생 사랑, 가족 사랑을 하며 지금 자신의 가족에 대해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친구를 보며 사랑과 정성은 자라는 것인지, 어려서 연습을 하는 것인지, 어쩌면 여섯 자매가 있는 가정에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메꽃 같은 친구가 한 송이씩 돌려가며 계속 피어나는 메꽃처럼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