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절에
오랫동안 집은 나에게 불편한 공간이었다.
어렸을 때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우신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깔끔한 외할머니의 비위를 맞추느라 부모님이 어려움이 많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셨는데 집에서 하루 종일 술을 드시며 자주 우셨다. 아빠는 간경화를 얻은 후에도 술을 끊지 못했다. 여러 번의 이사를 거쳐 아주 작은 다세대 주택에 살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언제 쫓겨날지 몰랐다. 학교에 있을 땐 잊고 있다가도 집에 가면 그 모든 걱정이 열 배로 크게 다가왔다.
다행히 고등학생 때까지는 하루 종일 학교에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자율학습에 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학교에 오래 머물 수 있어 좋았다. 집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괴로웠고 집에 머무는 시간은 불편했다.
문 밖의 계절은 아름다웠지만 집은 늘 차가운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일 뿐이었다. 작은 집 안에서 현실의 문제를 걱정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던 아이는 늘 제한 없고 아름다우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공간인 바다를 꿈꿨다. 전쟁으로 난민이 된 상황에서 아빠가 준 세계지도를 보며 희망을 품었던 작가 유리 슐레비츠처럼 스스로 푸른 공간을 만들어 나만의 계절을 보내며 버텼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아빠가 돌아가셨고, 나는 결혼을 했고, 동생이 죽었고, 친정 엄마와 함께 살았다. 몸이 많이 아픈 엄마와 함께 살며 다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얼마 전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가족을 보내고 난 지금, 집이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엄마를 보내고 꽤 길고 혹독한 겨울을 보내게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견딜만했다. 엄마가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고민과 고통을 모두 안고 떠나 준 듯하다.
요즘 평생 처음으로 조용한 아침을 맞이한다. 병원에 데려다 드려야 할 가족도,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하는 아이도 없는 나의 계절, 바깥이 겨울이어도 내 마음은 이곳에서 아늑하다. 더 이상 바다를 꿈꾸지 않는다. 집을 청소하고, 키우는 거북이에게 먹이를 준다. 블루투스 스피커에게 음악을 틀어달라고 말하고 빨래를 개고 책을 읽는다.
작품 <집,안식처> 안소영
큐레이션 @gonggan.goyoo
#공간고유 <고유한 순간들-그림을 보고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