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자유인 1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쿄 Oct 30. 2022

이야기

나는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다. 숲의 초입에는 아주 높다랗게 길고 잎이 푸른 나무들이 길게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대략 전방 500미터 정도 거리쯤으로 보인다. 얇고 긴 생머리에 기장은 종아리까지 오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었고 굽이 높은 뾰족구두와 속이 비치는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지금 날씨와 아주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나는 갑자기 빠르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뒤쫓아갔다. 하지만 나와의 그녀 사이에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이 참 빠르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짐작했던 것보다 실제는 훨씬 더 멀리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에서는 햇볕이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었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햇살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근한 느낌을 주어서 지금 이 순간에는 햇살이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새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라진 것 일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여자는 어느새 길을 벗어나 길이 나있지 않는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이 근방을 잘 아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걸어가는 모습처럼 보였는데, 나는 망설이면서 그쪽을 계속 쳐다보았다. 길이 나 있지 않은 숲 안으로 들어가면 따뜻한 햇빛을 느끼기 점점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갑작스럽게 따라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에 그녀를 포기하고서 그냥 햇살을 따라서 걸어가기로 했다. 해가 구름에 가려졌고 주위는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햇빛을 잃은 나무들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나무들은 시들어버렸고 내 앞의 길은 점점 좁혀져 가더니 결국에 끊어져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숲으로 가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의 한 교실에 교탁 옆에 책가방을 멘 소년이 수줍은 채로 서 있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과거의 내가 지방으로 전학을 왔었던 때였다. 한쪽 머리카락 꽁지를 노랗게 물들인 키 작은 소년은 수줍은 듯이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곧장 비어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나의 자리라고 말해주었고 곧바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어디서나 그렇듯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역시나 어리둥절했지만 수많은 관심 속에서 침묵만을 유지하지 않고 몇몇의 평범한 질문들에 나름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짝꿍은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떠한 계기로 인해서 나에게 약간 실망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내 외모에 존재하는 청결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부끄러웠지만 어려서 그것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겼던 것 같았다. 미적 감각이 부족했던 탓일까. 어떤 가정은 더러 마치 자신이 살고 있는 방을 주기적으로 청소한다는 개념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삶에서도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똑같이 잊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집안에 짐을 점점 불어나고 쌓이는 것은 마치 마음의 짐들도 함께 쌓여버려서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도 뿌옇게 보이는 것이었다. 어떠한 사람이든지 그 사람의 일상을 통해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집은 아직도 현관문의 유리가 깨진 채로 있었고 거실은 오래된 가구들 위에 너저분한 우편물들과 잡동 서니로 가득했다. 그 후로 상황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기억의 조각들이 꿈속에서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이전 11화 자유에 대한 외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