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판악 코스 #한라산 등반 #백록담 #고생 끝에 전우애 #추억 만들기
해발 고도 차이에 따른 기온과 바람이 이 정도로 컸던가? 가파른 나무계단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순식간에 얼음 슬러쉬로 변했다. 녹담만설(鹿潭晩雪)의 전설처럼 4월 하순인데도 불구하고 백록담 탐방로 주변은 바람길 모양대로 눈이 엉킨 식물군들이 거센 비바람에도 꼿꼿이 그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흰 사슴을 탄 신선이 물을 마셨다는 백록담은 한라산 정상의 산정화구이다. 겨울 한라산의 설경은 길면 봄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 한라산 백록담에 하얀 눈밭이 남아 있을 때 그 주변과 산 아래로는 유채꽃과 벚꽃이 피어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듯한 모습은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 12곳을 이르는 영주십이경(瀛州十二景)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녹담만설' 한라산의 첫눈과 끝눈 이야기, HanSH)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 펼쳐졌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가 야속하기만 했다. 젖은 돌길을 내려가는 발검음도 돌의 무게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너무도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려가는 짝꿍의 보조를 맞춰서 내려가다 보니 한 번도 아팠던 적이 없던 무릎이 갑자기 시큰거렸다. 박 바닥도 부르텄고, 허리도 빳빳해지고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몸이 젖어 추운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안전사고가 나지 않는 게 중요했다. 한걸음 한걸음 젖을 돌길 위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짝꿍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녀 곁을 계속 지키고 맴돌았다.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도 낯설고 멀기만 한지.....(내 사랑 내 곁에) 내려오는 길 또한 주변에 보이는 건 울창한 나무와 조릿대뿐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난 샤워기 물을 틀어 온수가 나오도록 한 후 짝꿍부터 들어가 체온을 녹이도록 선 조치했다. 사실 난 30년 전 군대로 갔다 왔는데 이 정도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하기엔 나도 너무 추웠다. 아내에게 SOS를 보낸 후 샤워실로 뛰쳐 들어갔다. 오랜만에 적과의 동반 샤워가 이뤄졌다. ^^;
일단 뭐든지 먹어야 했다. 우린 냉장고에서 제주XX맥주를 꺼내서 오늘 힘든 여정 완수를 서로 축하하고 자축하면서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맥주와 탕수육이 동이 났다. 부족한 2%는 라면으로 해결했다. 김치를 듬뿍 넣어 칼칼하게 국물을 우려냈다. 한국사람에겐 라면만큼 심리적 허기를 달랠만한 음식은 없는 것 같다. 배도 부르고 술을 먹어 몸도 이완되니 졸음이 찾아왔다. 착한 어린이는 이부터 닦아야 한다. 우리 둘은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탐라가 품은 민족의 영산이자 성산인 '녹담만설(鹿潭晩雪)의 전설'을 함부로 오르면 안 되는 이유를 우리 부부 등반 여정을 통해 누구보다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한라산은 '백두에서 한라까지'란 말에서 보듯이 한민족의 영역 범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한라산은 정복하기 위한 산이라기보다는 한반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영산의 이미지가 강한 산이다.
얼마 전 제주민속박물관에서 탐라 건국의 신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탐라를 창조한 설문대할망의 전설, 그리고 고을나(고씨), 부을나(부씨), 양을나(양씨) 삼신인이 땅(삼성혈)에서 용출해 자라나서 수렵생활을 하던 중 오곡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 심공주와 혼인하면서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농경사회로 발전하면서 백성이 많아지고 부유해져 탐라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 연혼포 :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를 맞이한 해변
** 혼인지 : 삼신인이 세 공주와 혼례를 올리고 목욕재계를 한 연못
** 신방굴 : 삼신인이 세 공주와 신방을 꾸민 굴
** 삼사석 : 삼신이 도읍을 정하려고 화살을 쏘아 맞춘 세 개의 돌
** 사시장올악 : 삼신이 도읍을 정하려고 활을 쏜 봉우리(오름)
아무리 봄기운이 완연해져도 한라산은 한라산이다(남한의 가장 높은 산이다). 산을 오르기 전에 반드시 날씨와 기온을 확인해 그에 맞는 옷과 장비를 준비해야만 한다. 특히 장시간 등반을 하고 고산지대로 오르다 보면 아무리 날씨가 따뜻해도 추위를 느낄 수밖에 없다. 등반을 하면서 옷 여려 벌을 챙겨가서 상황에 맞게 입고 벗고를 하는 걸 추천한다.
특히 비가 올 때는 가급적 등반을 자제하길 권한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9시간 이상 장시간 등반을 하기 때문에 체력 저하와 저체온증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등반로에 돌이 많기 때문에 등산화를 준비하면 좋겠다. 스틱은 주변 등산객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으나 몸의 균형이 필요한 분들은 구비하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체온 저하와 체력 감소를 위한 먹거리도 적절하게 준비해야 한다. 체력이 완등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커플이 백록담을 못 본 건 천추의 한으로 남겠지만 여정 내내 세한의 시간을 견디고 극복하면서 오랜만에 부부간 전우애를 싹 틔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더불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내 짝꿍에게 남은 여생 동안 더 이상의 한라산 등반은 절대 없을 거란 부작용도 있지만 말이다. ㅠㅠ
평생 나와 자식들 뒷바라지한다고 고생만 했던 내 짝꿍에게 다시 한번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기대보다 너무 잘해주었다고 말이다. 남은 탐라 한달살이 기간에는 다시는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그리고 앞으론 돌길보다 꽃길만 걸어보자고. 마지막으로 녹담만설의 전설을 함부로 오른 결과는.......(두구두구) 돈독히 쌓인 전우애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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