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며 나를 마주하다
30대 초중반, 첫출산
첫째는 어릴 때는 자기주장이 확실한 아기였다.
잘 놀다가도 배가 고프면 갑자기 뒤로 넘어가며 울어대는?!
좀 자라고도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뒤로 몸을 날려서... 그렇다. 마트나 백화점 바닥에 누워서 우는 아이가 내 아이였다(이러고 있음 엄마들이 개월 묻더니 얘는 참 빠르다고 ㅎㅎ 이런 거 빠를 필요 없는데.....). 원래는 36개월 지나고 훈육을 하라고 하지만 아이의 발달은 빨랐고 생떼는 심했고... 울고불고하면 엄마가 들어줄 수 없다는 훈육은 조금 빨리 시작했던 거 같다.
뭐든 글로 배우기에 임신했을 때 육아서를 한창 읽다가 어느 날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우라는 프랑스 육아법과 애착육아의 정석을 소개하는 일본 육아서를 같은 날 연이어 읽고 내려놨던 것 같다. 아, 그냥 다 하는 말이 다르구나. 그래서 딱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 책 표지와 원더 윅스 표, 그리고 찹쌀떡 가루의 떡 육아 블로그를 참고하며 아이를 키웠다.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는 왜 책 표지냐면 열심히 읽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애가 힘들면 '원더 윅스인가 보다(곧 지나가겠지)', '도약하는 건가 보다, 잘 자라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되어서 저 책의 제목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성격이 보통이 아닌 아이는 너무 위험하거나 민폐인 상황에선 진정하고 말로 하라는 훈육(위에 말한, 찹쌀떡 가루님 스타일)을 했지만 그 외에는 나름 수용해주며 키웠고(다행히 내 육아 동지들은 애가 화분을 엎으면 애 잘못이 아니라 화분을 애 손 닿는 곳에 둔 엄마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류의 엄마들이었고 그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15개월쯤 이사를 했는데 그 동네에서 아들은 양반으로 평이 180도 변했다. 그렇다, 말을 하기 시작하며 인지와 언어가 빠른 편이었던 아이는 급속도로 생떼를 줄이고 나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천방지축이던 요놈과의 라이프에서 말이 통해서 좋겠다는 부러움을 사는 날이 오다니..... 그즈음 나는 복직을 했고, 아들은 어린이집에도 적응을 잘해 즐겁게 다녔고, 모범생 소리를 들었었지. 어찌 보면 첫째 육아의 황금기였다.
물론, 맞벌이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육아와 가사는 여전히 오롯이 나의 몫이라 남편과는 엄청난 전쟁이 치러지던 시기였지만(아닌가? 나 혼자 열받았었나?)...
저번 화에서 얼핏 밝혔지만 저 평화로워 보이는 회상 가운데 아들과 아빠의 큰 마찰이 있었다. 그리고 나와 아들의 평화와는 달리 부자 관계는 갈수록 삐걱대고 있었다. 아이는 나와는 기질이 비슷했고, 나와 남편은 성향이 매우 다르다. 둘은 너무 상극이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걸핏하면 화가 났고, 그러다 보니 아들은 아빠를 거부했다.
그래도 이래저래 나는 어린이집이라는 최고의 육아 파트너가 있었고, 가기 싫다고 운 적 한 번 없는 아이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가 4살이 되었을 땐 이제 다 키운 느낌이라 하고 싶던 공부를 해볼까 박사 과정에 등록(타학교 타전공)까지 하는데 바로 둘째의 존재를 알게 된다. 둘째는... 뱃속에서 발견되었을 때 이미 14주였다. 그것도 너무 피곤해서 워킹맘의 삶은 매우 고단하다고 sns에 글도 남기고 친구랑 호텔에 쉬러 갔는데 사우나에서 친구가 너 배가 좀 나온 거 같다고 해서 발견되었다. 남편은 나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ㅎㅎ 그때가 연초여서 일하고, 대학원 가려고 학회 나가고 하면서 송년회도 많아 술을 간간이 마셔서... 그리고 남편이 종종 맥주 한 캔 같이 하고 싶어 해서 거절하다 미안하면 한 번씩 마셔왔어서 낳을 때까지 태아 알코올 증후군의 공포에 떨었다. 아무튼 겨우 안정되었던 우리 가정은 둘째의 등장으로 다시 휘저어진다. 엄마 바라기 아들은 별안간 아빠와 짝이 되어야 했다. 그 공백을 메꿔주기 위해 아빠랑 서울랜드 연간이용권도 끊어주고 연극, 뮤지컬, 영화도 예약해서 보내고 했다만(다행히 남편은 집에선 폭군이나 나가면 세상 자상한 타입) 엄마와 보내는 시간은 확 줄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점점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있었는데 신생아를 키우는 엄마에게 그것을 케어할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양가는 그다지 손주의 존재에 대해 뜨거운 분들이 아니었고, 남편은 애가 둘이나 분유도 탈 줄 몰랐다(물론 둘째는 거의 돌까지 모유수유... 이것도 첫째에겐 스트레스였겠지). 다들 첫째랑도 일대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내 고민에 답을 주었지만 물리적으로 한두 번 이벤트성은 겨우 했어도 꾸준히 지속적인 시간을 가지는 것든 불가능했다.
5살의 나날들을 보내며 하필 이사를 하며 옮긴 어린이집에서 아이와 맞지 않는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그 샘은 바로 전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이 장점으로 봐주는 면들까지 아이의 모든 면을 단점으로 보셨고,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 그 아이를 만드는 게 맞다는 걸 이때 느꼈다. 아이는 뭔가 점점 그 시선 만을 탓할 수 없게 변해갔다. 오해를 받게 행동하는 아이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던 와중 아이는 폭발한다.
"아빠가 자꾸 화내서 아빠랑 같이 살기 힘들어."
부랴부랴 아동청소년 심리지원 바우처를 알아봐 놀이치료와 미술치료를 오가며 받기 시작한다. 아이는 아빠와 동생에 대한 스트레스가 매우 높았다. 놀이치료에서 엄마와의 상호작용을 봐주겠다고 했던 날이 기억난다. 그걸 위해서는 동생을 놓고 가야 했고, 어디에 어떻게 맡겼더라? 아무튼 동생 없이 첫째랑만 센터에 가는 그날 아들은 너무 행복해했다. 아주 협조적이었고 기분의 질이 매우 좋아서 더 그랬겠지만 양육 태도에는 문제가 없다고 진단받았었다. 물론 아이에게도 빌런은 어차피 내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짠한데... 안 맞는 아빠와 지내야 했던 아들도 짠하고, 엄마 신경이 모두 오빠에게 가있어 엄마 몸만 차지하고 있던 딸도 짠하고, 그 와중에 혼자 동동거리던 나도 짠했던 시기였다. 남편, 미안. 그때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고, 애들한테 화내고 폭력적으로 굴던 님은 별로 안 짠해.
이때부터 첫째의 '정서'에 올인한 날들(이라기엔 나는 둘째 돌 좀 지나고 다시 일도 하고, 대학원도 다니는 미친 스케줄을 소화하지만)이 펼쳐진다. 문득, 그때 다 내려놓고 아이들에게만 말 그대로 올인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렇게는 내가 버티지 못했을지도...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썩 넉넉하지 않았고, 남편은 지킬 앤 하이드처럼... 지킬일 땐 내가 보내는 욱하는 부모 관련 지침에 반성하고 안 그러겠다고 하지만 애랑 마찰이 있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하이드는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다.
밖에만 나가면, 사람들만 있으면 세상 잘하는 척(엄밀히는 척이 아닐 것이다. 정말 완벽히 다른 페르소나)해서 사람들은 자상한 아빠라고 칭찬했고, 그때마다 아이들과 나는 억울한 마음에 실체를 말하곤 했다. 결과적으론 아이들은 귀여운 투정으로 보였고, 나는 세상 까칠한 아내로 보였을 뿐이지만. 그렇게 집에선 평화의 비둘기인 내가 악처로 비치고, 빌런인 남편이 세상 성격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엄청난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물론 가족으로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일 뿐... 내 남편은 사회에서는 매우 호인일 것이다. 단면으로 판단하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리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 방지용? ㅎㅎㅎ).
아이의 미술치료 샘은 언제나 나를 걱정하셨다. 이렇게 다 짊어지고 사시던 어머님이 갑자기 쓰러지는 걸 봤다며... 그런데 이때까지는 아무튼 나보다는 아들이 응급 상황이었으니 별 수 없었다.
5~7세 아이의 이슈는 '별난, 성격이 강한, 고집이 센'에서 '지나치게 섬세한, 눈치를 많이 보는, 영향을 많이 받는, 양가감정이 심한, 결정을 못하고 모방이 심한'과 같은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일부는 발달 과정의 자연스러운 것들이겠지만 최근 치료 샘께는 "보통 자기가 먼저 생겨나고 타인으로 확장되는데, 얘는 타인만 있고 자기가 없어요. 어른들에게는 예쁨 받고 칭찬받겠지만 안이 텅 빈 거 같을 거예요."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아이가 어릴 땐 몸을 갈아서 양육을 하느라 힘들었다면 아이가 커갈수록 한 사람을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키운다는 게 내 깜냥에 가능이나 한 일일까? 막막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다시 나의 주지화는 다시 나의 내면으로 향하게 된다(다음화 예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