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나 비관적인 사람이다. 어쩌면 이것은 성향이라기보다 힘든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일말의 희망을 쥐고 걸어갔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래서 지금은 멀리서 보면 매우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지만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낙관 아래에는 깊고 오래된 비관이 깔려 있는 양가적인 모습이라 평할 수 있겠다. 젊은 시절, 정말 와닿지 않아 했던 것을 꼽으라면 ‘긍정의 힘’?
나에게는 너무도 부당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는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분명히 맞는 말인 이런 이야기들이 왜 그리도 폭력적으로 느껴지던지. 그래서 정말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이 ‘긍정 심리학’이었다. 훗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계기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빅터 프랭클의 유명한 저서 덕분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보다 이전에 경험적으로 긍정의 힘, 내지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강하게 느낀 적이 있다.
나에게는 친하지만 전혀 멋있지 않은 대학교 선배 오빠가 한 명 있다. 대체로 나라는 사람의 취향이 보편적으로 멋지고 화려한 것보다 소소하고 여린 것들을 선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멋지지 않다가 어떤 의미인지 전달이 될까? 이 선배는 뭔가 굉장히 팔자가 좋아 보였다. 별 걱정도 없고,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서 당시 치열함이 선이라고 생각하던 나에게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그 자체였던 분이다.
그런데 아무튼 묘하게 운이 좋았던 선배. 군대도 카츄사로 수월하게 다녀오고, 취업을 목전에 두고도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는 것이다. 절대 학과가 좋거나 학점이 좋거나 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문과여서 학벌이 좋다고 해도 척척 취업이 쉽지는 않았는데 자기는 NGO에서 일하고 싶다며 아주 좋은, 공기업이다가 민영화된 대기업에 붙으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정말 앞에서 코웃음을 쳤다. 아유, 붙고 나서 걱정하세요. 거기 붙기가 쉬운 줄 아나... 그런데 덜컥. 그 선배는 그곳에 붙었다. 그리고 목표한 몇 년을 다닌 후, 과감하게 그만두고 사회복지 계열로 이직을 했다. 물론 다들 어렵다고 하는 계열이지만 명문대에 전에 일한 회사가 좋다 보니, 그리고 사회복지로 대학원까지 나왔다 보니 만족스러운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에게 ‘마음가짐’, 생각하는 것의 힘에 대해 처음으로 진짜 그런 게 있을까? 생각하게 한 것은 이 선배였다. 나는 그 당시, 하는 것마다 안 풀리는... 내가 그렇지 뭐, 하는 블랙 코미디의 삶을 살고 있었고 매사에 물론 확신이 없었다. 심지어 아무 장애물이 없이 일이 진척되면 불안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고, 내 삶이 이렇게 척척 풀릴 리가 없게 느껴져서 삐걱하는 순간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약간은 신나서 떠들었던 것 같다. 아우, 되는 것 없는 내 인생!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긍정, 끌어당김에 대한 생각들을 느꼈던 20대에 바로 적용했다면 삶이 많이 달라졌을까? 궁금해진다. 이제는 나도 내 삶에 일어나는 일/사고가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적다고 느끼게 된다. 그것보다는 그 일/사건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태도? 가 더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지. 평탄하지 않았고, 미성숙했던 과거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났고 그랬어야 했던 것 같다. 그때 바로 또 다 내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럼, 당신이 이 삶을 나 대신 살아 볼래요?' 이렇게 내 편을 들어준 나 자신에게 고마운 느낌도 든다. 내가 책임져야 할지언정 아픈 것은 아파하고 억울한 건 억울해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렇게 인정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제대로 아파하며 터널을 건너기도, 마음을 비우고 터널을 지나기도 하다 보니 천천히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반대로 말하면 상황은 내가 통제할 수 없으니 그만 집착하라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안나는 고래래요'라는 이 그림책은 부제가 '뭐든지 할 수 있는 마음의 비밀'이다. 아마도 저자가 다비드 칼리가 아니었다면 부제보고 안 펼쳐봤을 것 같은 이 그림책.
주인공 안나는 뚱뚱하다. 수요일마다 안나는 수영을 가는데 찬 물에 샤워하는 것도 싫고 안나가 다이빙할 때마다 친구들은 큰 소리로 비웃는다. 엄청난 물보라가 일어나기에 "안나는~ 고래래요~"라고 친구들은 입 맞추어 외친다. 위축되는 안나에게 수영 선생님은 마인드셋을 알려 주신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되거든. 나는 가볍다고 생각해 보렴."
안나는 20대의 나처럼 듣고 흘리지 않고 한 번 해본다. '물물물...' 그러자 진짜 샤워할 때 물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영이 끝나고 나올 때 늘 쳐다보는 무서운 아저씨 앞에서는 '나는 거인이다' 생각하니 무섭지 않아 아저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아저씨는 도망간다.
일주일 후 수영장에 간 안나는 자기가 로켓이라 생각하고 뛰어들자 물이 튀기지 않았고 가벼운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껏 수영을 했다. 이런 안나를 시샘하듯 보던 친구가 높은 곳에서 다이빙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해 보라고 한다. 안나는 올라가서 "나는 고래다. 슈퍼 고래!" 생각하며 멋지게 첨벙 뛰어든다.
이 그림책에서 특히 좋았던 부분은 친구들이 늘 놀려서 마음의 상처가 있었던 그 말을 그대로 마지막에 당당하게 외쳤다는 점이다.
"나는슈퍼 고래야!"
사실 내가 뚱뚱한데 날씬하다고 생각하면 날씬해지고, 지금 돈이 없는데 부자라고 생각하고 돈을 쓴다고 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가벼운 것들을 상상하며 가벼운 느낌을 받거나 부자의 생각을 배워서 따라 해 보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 고정된 생각을 바꿔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날씬해지진 않았지만 당당하고 멋진 슈퍼 고래가 된 안나처럼, 관점을 바꾸어 나를 가두던 집착에서 벗어나면 그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가짐의 문제를, 끌어당김까지... 그래서 현실이 변하는 것까지로 보지 않아도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상황을 바라보고 갈 것인지 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는 면에서
마음가짐은 중요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오히려 크리스마스, 새해 이런 날 풀려날 수 있다는 낙관을 가진 포로들이 더 빨리 죽었다는 점이다. 이런 근거 없는 희망은 더 큰 절망을 불러올 수 있고(안나가 자기가 날씬하다고 착각한다면) 나의 상황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나의 마음을 잘 다스려 보자.
나쁜 일은 안 생기면 좋지만, 이왕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그 안에서 의미를 찾든, 동료를 찾든, 해소책을 찾든 일단 조종할 수 있는 내 마음 붙들고 버티는 거다. 삶은 원래 고난이었지... 하며.
그래서 나의 삶은 여전히 가끔은 어두운 터널이지만 터널이 끝나는 지점의 햇살, 손전등으로 비추는 터널 안 벽의 무늬와 같은 이 길의 가장 즐거운 것들을 즐기며 걸어보겠다. 끝이 없으면 어쩌나 같은 고민은 접어 넣어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