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나를 돌아보는 일은, 김이 자꾸 끼는 거울을 계속해서 닦아 내며 나의 본질을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의 기억들일뿐, 가족들의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부당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할머니도, 엄마도 자꾸 말로 인정을 하며 그럼에도 감사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네가 나쁘다고 몰고 가니 나는 정말 오래 아팠다.
사랑했겠지. 열심히 키웠겠지. 이게 나의 양육자들의 최선이었겠지. 제일 싫어하는 광고 카피 중 하나가 초코파이 광고인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가 말이 되나? 마음속에 있는 정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고 표현하지 않으면 도통 알 수가 없다. 특히 사랑하지만 피곤하니까, 아끼지만 버릇없어질까 봐. 엄격이라는 푯말 아래 요즘 표현으로는 정서적 학대에 가깝게 키우셨다면, 아이에게 친밀감을 기대하지 마시라.
앞의 저 누명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마침 교환학생에 붙었던 참이라 나는 고1 1학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겁도 많고, 불안도 높은 나인데 혼자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 가능했던 건... 가족에게 공을 돌린다. 솔직히 말하면 미국에서도 친구들이 미친 듯이 그리웠지 가족은 그다지 그립지 않았다. 나에게는 정말 오직 친구들 뿐이었다. 당시 그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민간 외교관 느낌으로 한국인이 없는 시골 마을에 미국인 가정 홈스테이로 학생을 보내는 거였고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대도시 생활이 아니라 엄청난 시골 생활을 했다. 한국은 유명한 나라가 아니었고, 미국 애들이 "너네 나라도 학교가 있니?", "도로가 있니?" 이런 걸 물어보면 서울이 이 미국 시골보다 훨씬 발전했는데!! 하며 억울했다. 너네 나라에 학교가 있니가 아니라 이 마을에 학교가 없어서 옆 마을로 스쿨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기에 운전을 못하는 나는 학교 수업만 딱 듣고 집으로 와야 했고(미국의 친목 생활은 방과 후 시작된다.), 우리 마을엔 할머니들과 멕시코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에다 홈스테이 가정이 컨테이너 하우스였는데, 원래는 어느 정도 형편이 되는 가정만 호스트 패밀리를 할 수 있다만 코디네이터와 친하고, 호스트 가정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이래저래 감옥 간수 일을 하는 아빠와 전업 주부 엄마, 그리고 지금 내 아이들 나이쯤의 남매와 그렇게 살게 되었다.
미국 도착한 첫날 저녁 식사로 핫도그(꼬치, 미국에선 코니 도그, 냉동식품) 하나를 줘서 방에서 친구에게 배고프다고 편지를 쓴 기억이 난다. 그렇게 먹을 게 부족해 일이 주에 한 번 가족 차를 타고 마트에 가면 간식거리를 쟁여 사 왔다가 방에서 쥐가 나오기도 하고, 영어를 잘한다면 잘해서 뽑혀 온 건데 학교에서 말은 다 알아듣는데 대답을 잘 못 하니까 "She can't speak English."이런 말을 들으며 혼자 위축되기도 했던 그때 그 시절.
미국 가정은 아이를 안 때린다는 환상을 와장창 깨고 맨날 싸우고 때리고... 결정적으로 학생에게 공부할 방을 꼭 만들어줘야 하는데 저는 4살 아이와 방을 같이 썼다. 4살과 똑같은 크기의 침대가 하나 더 놓아진... 방에 책상 따위는 없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늘 같은 말을 했다. 너는 감사할 줄을 모른다고.... 학생에게 공부할 수 있는 방을 제공하지 않는 게 호스트 패밀리 교체를 요구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알게 되어 코디에게 문의를 했는데 코디와 내 호스트 맘은 절친이어서 어느 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호스트 맘이 "너 집 바꾸고 싶어? 그럼 바꿔." 이러는데 너무 당황해서 아니라고, 죄송하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렇게 나의 미국 생활도 썩 편치는 않았다. 대신 엄청난 사색의 시간을 보내고 왔다. 사람들이 "오, 미국 가서 영어 많이 늘어왔겠네?" 하면 나의 대답은 "미국 가서 소랑 나무랑 대화하다 왔지요."였지만 10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원가족과 떨어져 있는 만큼 나도 조금은 내적인 작업을 해볼 수 있었던 거 같고, 버텨낼 힘을 얻었다. 나의 의사 따위는 궁금해하지도 않던 집에서 내가 뭘 사고 뭘 입고 먹을지를 결정할 권리를 얻은 것만 해도 인간적인 성장에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고. 나름대로 엄마에게 그간 내가 서운했던 것을 장문의 이메일로도 보내보고 나 이제 진짜 즐겁게 살아야지 다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는 큰 문제가 터져 있었다.
그 사이 남동생이 중학교를 자퇴하겠다고 하여 매일 집이 뒤집어지고 있었던... 내가 미국에 있던 사이 우리 집은 이사를 했고, 남동생은 전학 간 학교에서 적응을 못했다.
내가 좀 잡초처럼 자랐다면 공주와 왕자인 언니와 남동생은 자기에게 무조건 맞춰주는 사람과만 어울릴 수 있었다. 언니는 그때 막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고 학창 시절에도 운 좋게 늘 남녀공학을 다녔으며 언니를 챙겨주는 남사친이 있는 편? 여자 친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는데 남동생은 남자들의 정글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집은 남동생의 반항과 빠따 소리 같은 걸로 가득 차 나의 다짐은 설 곳이 없었다.
당시 조용할 날이 없는 집에 스트레스받아 우니까 정말 어이없는 표정으로 "왜 네가 우냐?"라고 묻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우리에게 애들이 무슨 스트레스가 있냐고 맨날 혼내던 할머니셨는데 본인의 가장 사랑하던 손주가 망가져갈 때에도 공감 능력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니 할머니의 인생도 좀 슬프게 느껴진다.
언젠가 처음 본 이 그림책은 ‘작가님’에 대한 이해가 그림책을 이해하는 데에 주는 깊이감을 가르쳐준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은 처음에 보면 좀 당황스러울 수 있다. 한 무명의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계속 맞는 내용. 산을 오르는데 단박에 오를 줄 알았지만 쉽지 않더라는 말과 함께 계속 퍽퍽... 맞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길로 갈까? 그냥 내려갈까? 고민도 해보지만 바람이 불 때까지 조금만 더 가자 다짐하며 일어서는 선수. 또 퍽퍽 맞는다. 나는 뭘 하는 거지? 올라갈 수 있을까? 산 위에는 정말 바람이 불까? 무수한 물음들을 뒤로하고 그는 바람을 느낀다. 바람이 분다. 웃으며 그는 다시 가드를 올린다. 아무도 없는 모퉁이에서...
처음 이 그림책을 매주 그림책을 선정해 줌으로 모이던 나의 모임에 들고 갔을 때, 너무 어렵다는 말부터 조금 돈이 아까웠다는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난해했나? 했던 나의 생각은 고정순 작가님의 인터뷰들을 찾아 읽으며 녹아내렸다. ‘넘어지는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하지만 일어서는 것은 여전히 힘겹다. 나를 일으켜 준 이름 모를 권투 선수에게 이 책을 보낸다. 오늘도 일어서는 당신에게도’ 그림책 뒤표지에 실린 작가님의 말이다.
이 작가님이 궁금해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라는 책을 사보았다. 작가님 파트의 소제목은 ‘바닥에서 선택한 웃음’이었다. 작가님은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스물일곱에 드디어 평생 하고 싶은 꿈인 그림책 작가를 발견하셨지만 동시에 중증의 다발성통증증후군 진단을 받으신다. 사실 ‘가드를 올리고’는 "몸이 얼마나 아픈 거야?"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 이만큼 아파’라고 보여주려고 시작한, 자기 연민에서 시작한 책이라고 한다. 계속 작업이 잘 안 되어 엎다 보니 ‘세상에는 나보다 아픈 사람도 많은데,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게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책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완성한 책이라고 하고. 감히...라는 느낌으로 이 인터뷰를 읽고 울컥한 마음이 들었고 이 그림책을 너무 애정하게 되었다.
어느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삶, 솔직히 저 시기에는 못 해냈던 것 같다(대신 의미나 돌파구는 찾고자 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이 가미된 지금은 철저히 그렇게 살고 있다. 더 이상 울지 않는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펑펑 울었던 시간들이 있다. 석사 논문이 자꾸 엎어지며 힘든 마음에 찾은 교회에서 새벽 기도 시간에 그렇게 울었더랬다. "하나님, 그때 저와 함께 계셨다면 왜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셨어요? 왜 저를 그냥 두셨어요?" 하며 울고 울고 또 울었던 시간이 있었다. 결국은 이 모든 상황들이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을까? 나도 사랑받고 예쁘게 자라고 싶었는데...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이 아니라면 이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럼에도 잘 버텼다고, 잘 자랐다고,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 나에게 준 여리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나에게 맞는 일을 잘하고 있다고 나를 다독여 본다. 알아, 그래도 억울한 거. 그래도 다 지나갔어. 이제는 정말 꽃길만 걷자. 꽃길이 없으면 내가 꽃씨를 뿌리며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