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엄마는, 특히 어릴 때, 정서적인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 같은 건지, 내 새끼여서 나 같은 건지는 좀 헷갈리지만... 어릴 적 엄마가 "너 같은 애 한 번 낳아 봐라." 류의 말을 할 때는 전혀 겁나지 않았다. 나 같은 게 어때서? 이 정도면 훌륭한 아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엄마가 되니 나 같은 아이로 자랄까 봐, 아이가 부모라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주어진 환경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많이 된다. 아들의 예민함에 이런저런 공부를 거쳐 안정이 되자 말을 아주 야무지게 하는 딸이 등장했다. 엄마를 더 힘들게 하는 쪽이 딸인 건지, 아들이 저와 기질이 판박이어서 더 이해가 가서 딸이 상대적으로 더 예측이 안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빠한테 혼나면 "왜 이런 아빠랑 결혼했어?! " 라며 나를 질책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펼쳐지면 "나를 왜 낳았어?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라고 말하는 6세 딸을 키우고 있다. 얘도 아마도 나를 닮은 거겠지?
나도 아마 조용했지만 무난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유치원 때부터 뭔가 철학적인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단순하게 해야 할 일은 하는 거다! 식의 가풍에서 ‘왜 이 일을 해야 하지?’를 생각하는 돌연변이가 나온 거다. 정말 궁금해서 질문을 했다가 혼난 적이 너무 많다. 유난이라고 혼났던 일 중 생각나는 게 닭고기를 먹을 때도 내가 먹는 고기가 어느 부위인지 궁금했는데 내 아이가 그런다고 생각하면 싫긴 했을지도. 닭 엉덩이 쪽도, 내장 있는 갈비뼈 쪽도 먹기 싫어서 물었던, 혼나고 (내 시선에) 안전해 보이는 부위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뭐 지금은 닭똥집도 좋아한다.
우리 엄마는 나의 십 대 시절 내내 어느 사립 여중 학생주임이셨다. 응답하라 1998에서 우리 집엔 아빠가 없고 학주만 있다는 도롱뇽의 말이 공감이 갔다. 남들과는 반대로 학교에 갈 땐 치마허리를 한 단 접고, 집에 갈 때는 풀었던... 엄마네 학교가 훨씬 교칙이 엄해서 무릎이 절대 보이면 안 되었어서.
게다가 나는 서울의 부촌 옆에 위치한 서민 동네로 부유한 집 아이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고, 엄마는 경기도 중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동네에서 평생 일하셨다. 그래서 옷차림이나 행색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는데도 엄마는 거울 한 번만 봐도 겉멋이 들었네(교복 만세!), 도시락 먹던 초등학교 시절엔 친구들 앞에서 반찬을 여는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였는데 급식비도 못 내 수돗물 먹는 애들도 있는데 배 부른 줄 모르고 반찬 투정이네... 이런 반응이셨다(급식 만세!). 그저 주위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 달랐을 뿐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나의 고민들을 억압당하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이 때는 그래도 가족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지나가다 드라마에서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과일을 먹는 장면이 나오면 너무 슬펐던 기억이 있다. 화목한 가정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과일 또한 사과 하나 깎아서 6 식구가 나눠 먹었는데 내가 하나 먹고 더 먹으려고 하면 욕심이 많다고 할머니께 욕을 먹고 남동생은 많이 먹고 쑥쑥 자라라고 더 먹으라는 말을 듣고.... 참고로, 나는 고등학생까지 40킬로가 안 되어....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하면 안 친한 애들도 "넌 죽만 먹고 사니?" 라고 한 마디씩 했었고 남동생은 백 킬로가 넘어서 공익을 갔었지........ 하도 구박을 받아서 결혼하고도 내가 산 게 아니면 잘 안 먹게 된다. 이왕이면 이 한이 돈을 많이 벌어하고 싶은 거 다 사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승화되었으면 지금 좀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진다. 안타깝게도 가족과의 친밀감과는 별개로 근검절약하는 가정의 문화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돈을 좇으면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방향으로 고착이 된 것을 발견해 이 부분은 아직까지도 작업 중이다.
이렇게 아직도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부모님의 면모를 보면 이 가족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불공평하다는 생각... 할 만하지 않나? 중고등학생 때의 나는 그만 죽고 싶은 날들이 많은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집도 힘든데 학교에서도 친구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따돌림을 당한 나날도 있었으니까. 괴롭힘을 동반한 심한 따돌림은 아니었고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잘난 친구랑 친하게 지내다가 그 친구가 좀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며 나에게 절교를 선언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꽤 큰 무리가 친하게 지냈는데 내가 먼저 위축되어 그 무리를 떠났었다. 내 편이라고 편지를 준 친구도 있었는데 불편한 상황이 힘들어 내가 알아서 따돌림을 당하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그 친구의 이름을 악역에게 붙여 주려고 소중히 지니고 있다는 뒤끝 긴 이야기. 그래도 이 친구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죽어야 가족이 나에게 미안해할까?라는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했었다. 웃기게도 내가 죽어도 미안해하지 않을 것 같아서 관뒀다. 막상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섭기도 하고... 뛰어내려? 손목을 그어? 이런 무서운 방법들 외에도 백합이 가득한 밀폐된 방에서 자면 죽는다는데? 이런 귀여운(?) 자살 방법도 찾아봤던 것 같은데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과 선배(이자 선생님의 아들)가 선생님께 복수하려고 꽃을 선물해 죽인 걸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다. 기관지가 괜찮아서 실패했겠지만. 지금은 정말 살아남기를 잘했다 싶게 잘 지내고 있으니 터널 안에 있을 때는 너무 듣기 싫던, '시간이 약'이 맞을 수도.
이때의 나를 보면 ‘나쁜 씨앗’을 보는 것 같다. 여기 아주아주 삐뚤어진 씨앗이 있다. 이 씨앗이 지나가면 모두들 수군거린다, 정말 못된 씨앗이라고. 사실 다 들리는데 뭐 삐딱하긴 하니까. 약속도 안 지키고 씻지도 않고 거짓말도 밥 먹듯 하고 새치기도 당당하게 하니. 나쁜 짓을 말하려면 끝이 없는데 왜냐고 묻는다면 아주아주 삐뚤어진 씨앗이라면서.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평범한 해바라기씨였다.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꽃자루가 부러지며 깜깜한 해바라기씨 봉지에 갇혀 있다가 아저씨 입 속에 들어갔고, 그 순간 아저씨가 나를 뱉어내서 바닥에 붙은 껌 위에 떨어진 바람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내 안에서 무언가 달라졌다. 삐뚤어진 것. 웃지도 않았고, 혼자 다녔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누구하도고 친구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고약하게 굴기도 했고. 그게 편했으니... 그런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삐뚤게 산 시간이 있다 보니 쉽지는 않지만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삐뚤어질 때도 있지만 착한 마음이 들 때도 많고 가끔이지만 다른 씨앗을 도와주고 양보하기도 한다. 계속 노력할 거고. 지나가는데 이젠 그렇게 삐딱하게 굴지 않는다는 나에 대한 평가가 들리네!
우리 가족들 눈에는 내가 아직도 나쁜 씨앗일 거다. 나는 삐뚤어졌으니까.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혹은 외면하는...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한 명 한 명이 빠짐없이 모두 가해자였던 우리 가족. 그들에게는 내가 어릴 때 일로 아직도 꽁해있고 잘 웃지도, 살갑지도 않은 가족 밖에서만 친절한 나쁜 씨앗.
집 안에 내 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는데 친구까지 없었으면 나는 정말 버티지 못했을 거다. 언젠가 할머니가 오냐오냐 커서 사회에 부적응한 동생을 짠해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집에서 미움받은 대신 밖에서 예쁨 많이 받고 잘 지내는데, 네 동생은 불쌍해서 어쩌냐."
애착이 어그러진 데다 아직 미성숙한 나이였던 내가 밖에서 그 예쁨은 그냥 받았을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상처를 준 사람들은 이렇게 뻔뻔할까? 마치 난간에 매달린 내 손을 마구 밟아대서 죽기 살기로 버티다 보니 팔힘이 세져 챔피언이 되었는데, 수상 소감에서 자기 덕에 강해진 건데 왜 감사의 말을 안 전하냐는 그런 말을 듣고 있는 느낌? 한창 뛰어내리고 싶고, 뛰어들고 싶은 시간들을 잘 헤쳐나갔다고 생각했을 즈음 그 일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