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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밍 Sep 27. 2023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

‘나쁜 씨앗’ by 존리 존/피트 오즈월드

아이와 엄마는, 특히 어릴 때, 정서적인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 같은 건지, 내 새끼여서 나 같은 건지는 좀 헷갈리지만... 어릴 적 엄마가 "너 같은 애 한 번 낳아 봐라." 류의 말을 할 때는 전혀 겁나지 않았다. 나 같은 게 어때서? 이 정도면 훌륭한 아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엄마가 되니 나 같은 아이로 자랄까 봐, 아이가 부모라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주어진 환경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많이 된다. 아들의 예민함에 이런저런 공부를 거쳐 안정이 되자 말을 아주 야무지게 하는 딸이 등장했다. 엄마를 더 힘들게 하는 쪽이 딸인 건지, 아들이 저와 기질이 판박이어서 더 이해가 가서 딸이 상대적으로 더 예측이 안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빠한테 혼나면 "왜 이런 아빠랑 결혼했어?! " 라며 나를 질책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펼쳐지면 "나를 왜 낳았어?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라고 말하는 6세 딸을 키우고 있다. 얘도 아마도 나를 닮은 거겠지?
 
도 아마 조용했지만 무난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유치원 때부터 뭔가 철학적인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단순하게 해야 할 일은 하는 거다! 식의 가풍에서 ‘왜 이 일을 해야 하지?’를 생각하는 돌연변이가 나온 거다. 정말 궁금해서 질문을 했다가 혼난 적이 너무 많다. 유난이라고 혼났던 일 중 생각나는 게 닭고기를 먹을 때도 내가 먹는 고기가 어느 부위인지 궁금했는데 내 아이가 그런다고 생각하면 싫긴 했을지도. 닭 엉덩이 쪽도, 내장 있는 갈비뼈 쪽도 먹기 싫어서 물었던, 혼나고 (내 시선에) 안전해 보이는 부위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뭐 지금은 닭똥집도 좋아한다.

우리 엄마는 나의 십 대 시절 내내 어느 사립 여중 학생주임이셨다. 응답하라 1998에서 우리 집엔 아빠가 없고 학주만 있다는 도롱뇽의 말이 공감이 갔다. 남들과는 반대로 학교에 갈 땐 치마허리를 한 단 접고, 집에 갈 때는 풀었던... 엄마네 학교가 훨씬 교칙이 엄해서 무릎이 절대 보이면 안 되었어서.
게다가 나는 서울의 부촌 옆에 위치한 서민 동네로 부유한 집 아이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고, 엄마는 경기도 중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동네에서 평생 일하셨다. 그래서 옷차림이나 행색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는데도 엄마는 거울 한 번만 봐도 겉멋이 들었네(교복 만세!), 도시락 먹던 초등학교 시절엔 친구들 앞에서 반찬을 여는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였는데 급식비도 못 내 수돗물 먹는 애들도 있는데 배 부른 줄 모르고 반찬 투정이네... 이런 반응이셨다(급식 만세!). 그저 주위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 달랐을 뿐이겠지만 는 그렇게 의 고민들을 억압당하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이 때는 그래도 가족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지나가다 드라마에서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과일을 먹는 장면이 나오면 너무 슬펐던 기억이 있다. 화목한 가정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과일 또한 사과 하나 깎아서 6 식구가 나눠 먹었는데 내가 하나 먹고 더 먹으려고 하면 욕심이 많다고 할머니께 욕을 먹고 남동생은 많이 먹고 쑥쑥 자라라고 더 먹으라는 말을 듣고.... 참고로, 는 고등학생까지 40킬로가 안 되어....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하면 안 친한 애들도 "넌 죽만 먹고 사니?" 라고 한 마디씩 했었고 남동생은 백 킬로가 넘어서 공익을 갔었지........ 하도 구박을 받아서 결혼하고도 가 산 게 아니면 잘 안 먹게 된다. 이왕이면 이 한이 돈을 많이 벌어하고 싶은 거 다 사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승화되었으면 지금 좀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진다. 안타깝게도 가족과의 친밀감과는 별개로 근검절약하는 가정의 문화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돈을 좇으면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방향으로 고착이 된 것을 발견해 이 부분은 아직까지도 작업 중이다.

이렇게 아직도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부모님의 면모를 보면 이 가족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불공평하다는 생각... 할 만하지 않나? 중고등학생 때의 는 그만 죽고 싶은 날들이 많은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집도 힘든데 학교에서도 친구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따돌림을 당한 나날도 있었으니까. 괴롭힘을 동반한 심한 따돌림은 아니었고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잘난 친구랑 친하게 지내다가 그 친구가 좀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며 에게 절교를 선언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꽤 큰 무리가 친하게 지냈는데 가 먼저 위축되어 그 무리를 떠났었다. 내 편이라고 편지를 준 친구도 있었는데 불편한 상황이 힘들어 내가 알아서 따돌림을 당하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그 친구의 이름을 악역에게 붙여 주려고 소중히 지니고 있다는 뒤끝 긴 이야기. 그래도 이 친구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죽어야 가족이 나에게 미안해할까?라는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했었다. 웃기게도 내가 죽어도 미안해하지 않을 것 같아서 관뒀다. 막상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섭기도 하고... 뛰어내려? 손목을 그어? 이런 무서운 방법들 외에도 백합이 가득한 밀폐된 방에서 자면 죽는다는데? 이런 귀여운(?) 자살 방법도 찾아봤던 것 같은데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과 선배(이자 선생님의 아들)가 선생님께 복수하려고 꽃을 선물해 죽인 걸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다. 기관지가 괜찮아서 실패했겠지만. 지금은 정말 살아남기를 잘했다 싶게 잘 지내고 있으니 터널 안에 있을 때는 너무 듣기 싫던, '시간이 약'이 맞을 수도.

이때의 나를 보면 ‘나쁜 씨앗’을 보는 것 같다. 여기 아주아주 삐뚤어진 씨앗이 있다. 이 씨앗이 지나가면 모두들 수군거린다, 정말 못된 씨앗이라고. 사실 다 들리는데 뭐 삐딱하긴 하니까. 약속도 안 지키고 씻지도 않고 거짓말도 밥 먹듯 하고 새치기도 당당하게 하니. 나쁜 짓을 말하려면 끝이 없는데 왜냐고 묻는다면 아주아주 삐뚤어진 씨앗이라면서.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평범한 해바라기씨였다.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꽃자루가 부러지며 깜깜한 해바라기씨 봉지에 갇혀 있다가 아저씨 입 속에 들어갔고, 그 순간 아저씨가 나를 뱉어내서 바닥에 붙은 껌 위에 떨어진 바람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내 안에서 무언가 달라졌다. 삐뚤어진 . 웃지도 않았고, 혼자 다녔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누구하도고 친구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고약하게 굴기도 했고. 그게 편했으니... 그런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삐뚤게 산 시간이 있다 보니 쉽지는 않지만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삐뚤어질 때도 있지만 착한 마음이 들 때도 많고 가끔이지만 다른 씨앗을 도와주고 양보하기도 한다. 계속 노력할 거고. 지나가는데 이젠 그렇게 삐딱하게 굴지 않는다는 에 대한 평가가 들리네!

우리 가족들 눈에는 가 아직도 나쁜 씨앗일 거다. 는 삐뚤어졌으니까.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혹은 외면하는...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한 명 한 명이 빠짐없이 모두 가해자였던 우리 가족. 그들에게는 내가 어릴 때 일로 아직도 꽁해있고 잘 웃지도, 살갑지도 않은 가족 밖에서만 친절한 나쁜 씨앗.
집 안에 내 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는데 친구까지 없었으면 는 정말 버티지 못했을 거다. 언젠가 할머니가 오냐오냐 커서 사회에 부적응한 동생을 짠해하며 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집에서 미움받은 대신 밖에서 예쁨 많이 받고 잘 지내는데, 네 동생은 불쌍해서 어쩌냐."

애착이 어그러진 데다 아직 미성숙한 나이였던 가 밖에서 그 예쁨은 그냥 받았을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다. 어쩌면 상처를 준 사람들은 이렇게 뻔뻔할까? 마치 난간에 매달린 내 손을 마구 밟아대서 죽기 살기로 버티다 보니 팔힘이 세져 챔피언이 되었는데, 수상 소감에서 자기 덕에 강해진 건데 왜 감사의 말을 안 전하냐는 그런 말을 듣고 있는 느낌? 한창 뛰어내리고 싶고, 뛰어들고 싶은 시간들을 잘 헤쳐나갔다고 생각했을 즈음 그 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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