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사회가 그러하듯, 가정이라는 곳도 철저히 위계와 서열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노골적인지의 문제일 뿐, 아이들도 귀신 같이 엄마와 아빠 중 누가 실세인지... 누구를 꼬셔야 나의 욕구를 관철시킬 수 있을지 알고 있지 않던가?!
적어도, 아들을 낳으면서부터 과부로 혼자 키우며 살았던 할머니와, 그녀의 독자, 그리고 그 독자와 결혼한 망한 집안을 복구하려 가장 역할을 일찌감치 했던 엄마로 구성된 우리 집에는 아주 분명한 서열이 있었다. 엄마와 내가 좋지 않은 경험들을 공유한 데에는, 그녀와 나의 스토리도 있지만 우리가 최약체들이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권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힘의 우위로도 정해지겠지만 그 집의 권력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향을 선호하는지로도 정해진다고 느꼈는데 우리 집의 경우 막강한 힘을 지닌 할머니에게 남자라는 이유로 섬김을 받은 아빠와 남동생, 그리고 결혼하고 처음 낳은 첫 손주이자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으로 할머니에게 밀리지 않았던 언니를 빼면 엄마, 그리고 최하단에 내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도 절대 강하거나 자식들을 이겨 먹는 분은 아니셨고, 그러니 월급도 다 할머니께 갖다 바치고 한 달에 7만 원씩 용돈 받아서 생활하셨겠지. 심지어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경제적 가장이었음에도 아빠가 주식으로 큰돈을 날려도, IMF라 눈치 보인다고 편집장 자리를 집어던지고 나오셔도 할머니는 아빠 기죽는다고 한 마디를 못 하게 단속하셨고, 그렇게 아빠는 내내 누리고 사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이제는 엄마가 조금씩 아빠를 조종하는 것 같은 순간들도 보인다. 그렇게 자식들에게도 약자였던 엄마가 오롯이 감정을 분출할 수 있었던 건 본인보다 아래에 있던 나뿐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집에 센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언니랑 남동생에게도 동네북이었다. 둘이 싸우다 해결은 안 되는데 감정이 해소가 안 되면 반격하지 못하는 나를 때리고 갔다. 당시엔 내가 평화주의자여서 맞고 당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힘의 논리에서 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니와 남동생은 서로 컴퓨터 모니터를 던지며 싸울 정도로 강성들이었으니, 가정 내에서 한정. 그렇게 집은 나에게 지옥이었던 것 같다. 언니와 방을 같이 썼는데, 기분이 안 좋으면 나를 괴롭혔다. 언니가 막 때리고 베개, 이불을 다 뺏어가면 약했던 나는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 아빠가 와서 나를 혼냈다. 조용히 하라고. 그렇게 방에서 나와 화장실 욕조에서 울면서 잠든 적도 있다니... 요즘의 파이팅 넘치는 나로 돌아가서 한 번 맞서보고 싶다고 쓰며 상상해 보건대 그때 그 시절 그 상황으로 돌아가면 똑같을 것 같다. 자매인데 왜 친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저 웃는다. 지금은 멀쩡한 언니라서 형부는 아마 내가 정말 어마무시하게 삐딱한 동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딱히 못되게 구는 건 아니지만 시종일관 뚱함) 나는 언니 때문에 받은 상처가 너무나도 많은데 그녀는 기억도 하지 못하니까. 그런 언니라도 너무 좋아하고 따라다니던 시절, 암요. 있었지.
그런데 용서를 하고 못하고, 이런 문제는 전혀 아니고 그냥 나랑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굳이 친하게 지내려고 에너지를 쏟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그저 필요할 때 안부를 묻고, 아이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겉보기엔 무난 무난하게 지내고 있다. 이혼의 이유로 성격 차이를 꼽는 것과 비슷한 기분 아니겠나.
'가족과 불화한 이유: 성격 차이'
이상한가?
그래서 이 그림책을 골랐나 보다.
이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을 보며 동질감을 느낀 것 같다. 풀밭에 들쥐 가족이 살고 있는데 이 들쥐들은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다. 딱 한 마리, 프레드릭만 빼고. 뭐 하냐는, 왜 일을 안 하냐는 들쥐들의 질문에 프레드릭은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겨울이 왔고 먹이를 먹으며 지루한 겨울을 보내다 보니 양식이 다 떨어진다. 그러자 들쥐들이 프레드릭에게 묻는다. "네 양식들은 어떻게 되었니, 프레드릭?" 그러자 프레드릭은 찬란한 금빛 햇살을, 파란 덩굴 꼿, 노란 밀집과 붉은 양귀비꽃, 초록빛 딸기 덤불 이야기를 들려 준다. 들쥐들은 그 색깔들을 또렷이 볼 수 있다!! 그렇게 프레드릭은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특별한 생쥐가 된다.
지극히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우리 가족들 눈에는 내가 프레드릭처럼 보였겠지?
꿈을 꾸고 이상을 말하는 존재. 어느 것이 맞고 틀리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다수 속에 소수로 있는 것은 외로운 일다. 그래서 프레드릭을 열렬히 응원하며 책을 보았다. 물론 다른 친구들이 모아준 식량이 있어 프레드릭이 ‘개미와 베짱이’의 베짱이처럼 얼어 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프레드릭이 마지막에는 인정을 받아서 큰 위안이 되는 그림책이었다.
결국 가족 간의 위계와 서열을 녹이는 방법도 사회에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상을 인정하기. 서로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고 각각의 역할을 제 자리에서 잘 수행하는 상호보완적인 존재가 되기.
역설적이게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엄마가 "할머니가 하얀 걸 까맣다고 하면 그건 까만 거다(다른 가족은 약자가 아니어서 필요하지 않았던 엄마의 소중한 생존 전략)"를 나에게 가르치려고 할 때... 논리적인 것만큼은 중요했던 나는 엄마와 피 터지게 싸우며 그러한 권위에 대항을 했었는데 프레드릭처럼 서로 이해되지 않았어도 좀 내버려 두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프레드릭은 사회에 부적응한 약자일까, 다른 쥐들과 차원이 다른 우월한 강자일까?
요즘 유행하는 MBTI에 녹여보면 T들 사이에 F가 필요한 이유로도 볼 수 있겠다. (F 사이에 T가 하나 있는 사회보다는 이쪽이 나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