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 듣는 아이인 척했던 시간이 많았더랬죠.
이젠 세월이 흘러 저도 어른이거든요.
하지만 어릴 적 그 모습을 버리진 못했나 봐요.
아, 변명하려 했지만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 무슨 소용 있나요.
내 감정조차 속여 온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일 뿐일 걸요.
그래요, 그런 거죠.'
20대에 나의 주제가라고 생각했던 델리스파이스의 ‘저도 어른이거든요’ 노래 가사로 이번 글을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착한 아이였다. 가뜩이나 타고나길 순한 아이였는데 착한 아이일 걸 강요받았다. 그러다 보니 나를 지우고 착한 아이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초1쯤 말썽이 심한 남자애가 아무 이유 없이 하굣길에 나를 때려서 엄마한테 일렀을 때 들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네가 뭔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렸겠지. 네가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엄마는 나를 어떤 아이로 키우고 싶으셨던 걸까? 예의 바른 아이? 배려심이 넘치고 희생적인 아이? 나는 그만 자존감이 낮고 위축된 아이로 자라 버렸다. 준비물 같은 것도 맨날 반 친구한테 뺏기고, 혹은 양보하고... 연필이 준비물이면 늘 여분을 가져갔는데 여분은 몽당이거나 좀 메인이 아닌 이유가 있는? 막상 그걸 빌려주려고 하면 미안하고 나쁜 거 같은 거다. 그래서 좋은 걸 늘 친구들에게 빌려주고 나는 이상한 걸 쓰곤 했다.
어른이 되고 한동안 '나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류의 책에 꽂히고 했던 것은 내가 나에게 가장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
초등학교 3학년 때 계단에서 넘어져서 새끼손가락이 아팠는데 담임선생님도 할머니도 괜찮다고 해서 넘어갔던 일도 있다. 이게 사실 학교를 언니랑 같이 가려고 나가는데 언니가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 버리고 혼자 내려가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다 넘어진 건데 엄마한테는 보여주면 혼날 것 같아 이야기를 안 했다. 나중에 엄마가 휘어진 손가락을 발견하고 병원에 갔더니 부러졌다 잘못 붙어서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엄마가 되어 생각해 보면 너무 안쓰럽다. 아프다는 것조차 나의 느낌을 믿지 못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신념이 부족했다는 점이. 이때 했던 생각이 아직도 기억이 나서. ‘아, 아프네. 그런데 이 정도면 아픈 거 맞나?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 아플 때 아프다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절뚝절뚝 학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내가 주인공인 삶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너무 궁금했던 기억도 있다. 암만 해도, 나는 주인공인 친구를 위해 존재하는 엑스트라였어서,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인생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관계에서 어떤 포지션을 주는지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나도 아마 약간은 내 아이들이 양보 잘하고 예의 바르고 배려심이 있기를 바랐었을 터이다. 피는 못 속인다고 남한테 피해 주는 게 너무 싫었기에. 그런데 어느 날부터 첫째가 동생이나 친구들에게 지나치게 양보하고 속상해하는 것이다.
"네 마음이 가장 중요하니 네가 속상해가며 양보할 필요는 없는 거야."
엄마처럼 키우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첫째의 놀이치료 선생님은 아이가 자신이 없고 남만 있다고 했다. 발달심리학적으로 내가 먼저 발달해서 자기중심적인 시기를 지나 타인에게도 관심이 확장이 되는 건데 얘는 내가 없이 타인에 대한 배려만 있어서 어른들에게는 칭찬받을지언정 마음이 텅 빈 느낌을 받을 거라고. 어린 시절 나처럼 추워도 옷을 더 입을지 말지조차 나의 의견을 묻곤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이 많아졌던 4년 전. 나의 고민은 여러모로 많은 것이 괜찮지가 못한, 예민한 데다 행복하지 못했던 불안정 애착의 엄마가 아무리 겉으로 애를 써도 예민한 내 아이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놓은 감정을 다 느끼며 자라는 건가?
아니면 이건 그냥 부모가 어떻게 해주기 힘든 타고난 기질?
여기 그림책 안에도 한 명이 있다. 한 번 만나 볼까? 이 세상 반듯한 친구의 그림자를 보시라.여기... 모두가 착하다고 칭찬하는 사탕이가 있다. 언제나 말을 잘 듣는 아이로 동생이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도, 친구가 짓궂은 장난을 쳐도, 치과에 가거나 무섭거나 넘어져도 사탕이는 절대 울지 않는다. "우리 사탕이는 아파도 참을 수 있지? 울지 않지?"라는 말을 들으며 의연하게 피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는 사탕이의 그림자는 마구 울고 있다. 제 멋대로인 동생이 사탕이의 그림을 다 찢어 버려도 동생이 몰라서 그런 거니까 괜찮단다, 엄마가. 사탕이의 그림자는 동생을 쥐어 박고 있다. "우리 사탕이는 저렇게 떼쓰고 고집부리지 않지? 착한 아이니까." 세상에. 갖고 싶은 거 많을 텐데... 눈길 한 번 안 주고 무표정하게 엄마 손을 잡고 가네. 물론 그림자는.... 어느 날 밤, 사탕이가 착하게 자고 있는데 그림자가 찾아와 힘들었다고 호소를 한다. 착한 아이도 울고 싶을 때는 울고, 화날 땐 화내도 된다고, 싫을 땐 싫다고 해도 된다고 알려 주는 것이 자기 그림자인 것이 좀 슬프네. 이제 사탕이는 할 말을 한다. 대신 정말 예쁘게 활짝 웃게 된다. 웃고 있는 사탕이 뒤로 다른 착한 여자 아이가 텅 빈 눈으로 지나가며 그림책은 끝난다.
너무 좋으면서 싫은 그림책이다. 왜!!! 착해야 하냐고!! 왜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말대꾸라 나쁜 아이냐고!! 왜 울면 선물을 안 주냐고!!! 캐롤 ‘울면 안 돼’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 손!! 지금의 나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 무해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잘 챙기고 건강한 정신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도 나의 몫을 하겠다. 무엇보다 나를 판박이처럼 닮은 첫째에게 더 이상 양보하라거나,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필요 없는 사회여서가 아니라 사회적 민감성이 너무 높은 우리 아이는 자칫 자신을 잃기 쉬운 아이여서. 아이들은 모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같은 그림책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누군가에게는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반대로 자신을 지키는 법이 배워야 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