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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밍 Oct 01. 2023

답답해도 기다려주세요

‘곰씨의 의자’ by 노인경

10대에 비하면 나의 생각을 조금은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나는 자존감이 낮은 20대였다. 자존감이 낮은 명문대생의 나날은 올록볼록한 그 간극을 채우는 시도들로 채워져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주변에서 너는 그런 말을 듣고 화도 안 났냐는 이야기를 듣고 하면서 ‘기준’이라는 것을 조금씩 익혀 갔던 것 같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나를 지키는 그 기준.     


대학 시절은 돌이켜보면 재밌었다.

처음으로 엠티도 가고, 술도 많이 마셨고, 동아리에서 공연도 했다. 공부보다는 나의 취향을 찾느라 바빴던 것 같다. 물론 알바로 나름의 경제적인 독립도 했고... 그로 인해 앞에서 겪은 어려움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여전히 과외 갑자기 끊겨서 차비가 없고 밥을 못 먹고 한 나날은 있었어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유년기보다 덜 절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럼에도 대학 생활이 마냥 즐겁지 않았던 것은 학교 사람들이 어딘가 나와 다른 사람들 같았다.

딱 루시드폴 노래의 가사 중 '나를 둘러싼,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즐겁다.'는 느낌?

여유롭고 자존감 단단한 사람들 속에서 쭈굴대며 숨어있는 듯한 나날이었음에도 이곳에서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마음을 붙인 곳은 학교가 아니라 한 봉사단체였다. 그곳 사람들은 따뜻했고 가족 같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봉사활동을 하고 뒤풀이를 하는 데 많은 나날을 보냈다. 이 상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서로를 보듬으며 큰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그 와중에 계속 과외나 알바를 해야 했고 틈틈이 홍대 인디밴드를 보거나 대학로에서 후기 써주는 체험단 등으로 활동하며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았다. 어릴 적 책으로 나를 치유했다면, 20대엔 예술영화와 인디음악으로 인생을 배웠다. (+당시 한국 여작가님들 소설: 배수아, 전경린, 신경숙....)    20대의 나는 다른 의미로 흑화 되고 있었다. 시니컬한 염세주의자? ㅎㅎ     

나부터가 내 삶에서조차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조연으로 살아왔는데 주인공들이 가득한 대기실에 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목표가 있을 땐 달리기가 쉬웠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느낌이랄까.

정말 열심히 살긴 했는데 방향이 없이 달리다 보니 무작정 불태우다가 번아웃이 오면 다 내려놓아 버리고를 반복했던... 감정기복이 가장 크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 내 싸이월드는 화려한 미니룸과 신나는 음악/텅 빈 미니룸과 암울한 음악이 번갈아 걸리며 피폐한 나의 정신상태를 대변했다(요즘의 카톡 프사 역할? ㅎㅎ).     

불면증이 계속되고 학교도 자퇴하고 싶던 즈음, 처음으로 학교 상담센터를 찾게 되었다.


우울 지수가 상당하다며 급으로 바로 대기 없이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나는 자살 생각이 없는데 왜 자꾸 자살에 대한 염려성 발언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안 좋은 상태였는데 스스로는 그 심각성을 못 느꼈던 것 같다.     

이즈음 나는 가족과는 푼 것이 없었다. 귀갓길 집 앞에 엄마가 보이면 같이 엘리베이터 타기 불편해서 숨어있다 올라갔고, 할머니와 언니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고, 아빠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남동생은 "아빠를 죽이고 싶다."는 둥 굉장히 격해있던 시절이었다. 집에서는 동생이 어느 날 집에 불을 지르는 건 아닐까 불안했고, 나의 모든 행동이 통제받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통금이 있었지만 싸워가며 집에서 잠만 겨우 자는 생활이었다.     

학교에서는 수업에는 영 흥미가 없고 겨우겨우 F를 피하는 게 목표였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었다. 대인관계도 수월하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가족이랑도 잘 못 지내는 나는 인간관계가 잘 될 리가 없다는... 이미 망했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상담에서 뭘 했는지 기억은 별로 없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이 엄마를, 원가족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라고 시켰고 나는 끝까지 하지 못했다. 나는 이때까지 큰 소리로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이 점에서 내 남편은 자기가 내 병을 고친 은인이라고 생각함). 그저 내가 참는 게 익숙하고 편했고, 내 탓이라고 돌려버리는 것이 쉬웠다.     

지금 돌아보면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을 충실히 지나온 것이겠지만 여하튼 이때의 나는 조금 망가져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 볼 땐 배부른 명문대생의 고민으로 보이겠지만 자존감이 이보다 더 낮을 수 없어 명문대생이라는 것조차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밖에 느끼지 못하던.... 이때의 나를 보면 이 그림책의 주인공이 생각난다.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시집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곰씨가 있었다. 어느 날 이 곰씨의 의자에 토끼 한 마리가 찾아온다. 모험가 토끼의 탐험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듣고 있는데 춤꾼 토끼가 지나가다 아픔을 나누며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이 두 토끼는 결혼을 하게 되고 곰씨는 이들을 진심으로 축하해 준다. 그런데, 토끼들은 아이들을 낳고, 낳고, 또 낳고, 어느 순간부터 곰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심지어 곰씨의 소중한 화분도 토끼 아이들 때문에 수난을 당하고... 곰씨는 그런데 말을 하지 못한다.

대신 곰씨는 토끼들이 앉지 못하게 페인트도 칠해보고, 다른 의자도 만들어 보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지만 아기 토끼들 앞에선 모두 무용지물이다. 결국 우리의 우아한 곰씨는 의자에 똥을 싸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데 이마저도 내리는 비에 뭉개지고 "나보고 뭘 더 어쩌란 말이야! 나는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곰이라고"를 외치며 쓰러진다. 쓰러진 곰을 토끼들이 돌봐주고 깨어난 곰은 드디어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저는 여러분이 좋아요. 하지만 그동안 저는 마음이 힘들었어요. 물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해요.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요. 저는 조용히 책을 읽고, 명상할 시간이 필요해요. 앞으로 제 코가 빨개지면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니 다른 시간에 찾아와 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제 꽃을 살살 다뤄주세요."


이들은 이렇게까지 하면서 같이 지내는 이유가 뭘까? 이렇게 안 맞고 힘들면 그냥 훌쩍 떠나면 되는 거 아닌가? 가족도 닌데...라고 생각하다 보니 '가족'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 걸까 생각에 잠기게 된다.

떠날 수 없다면, 이렇게 같이 지내야 했다면... 그 시절 내가 우리 가족에게 했어야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남편한테는 종종 하는 이 말일까?

"나를 존중해 달라. 우리는 가족으로써 어찌 됐든 나쁜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무심코 던진 언행들에 나는 마음이 힘들다. 나에게 예의 없게 하는 건 참지 않겠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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